충남 홍성군은 10월 25일 오전 10시 30분 김좌진 장군 생가지 내 사당인 백야사에서 ‘제88주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추모제’를 거행했다.

김좌진 장군은 홍성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며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끌었다. 홍성군은 김좌진 장군의 이러한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청산리전투의 승전기념일인 10월 25일에 추모제를 봉행한다.

충남 홍성군은 10월 25일 오전 10시 30분 김좌진 장군 생가지 내 사당인 백야사에서 ‘제88주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추모제’를 거행했다. [사진=홍성군]
충남 홍성군은 10월 25일 오전 10시 30분 김좌진 장군 생가지 내 사당인 백야사에서 ‘제88주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추모제’를 거행했다. [사진=홍성군]

 

이날 추모제는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김을동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국민의례 ▲추념사 ▲추모사 ▲헌화 및 분향 ▲추모의 글 낭독 ▲독립군가 제창 등의 순서로 열렸다.

홍성 출신 김좌진 장군은 1889년(고종 26년) 11월 24일(음) 홍주 고남하도면(高南下道面) 행재리(杏材理)(현 홍성군 갈산면(葛山面) 행산리(杏山里)에서 선운 김상용의 12세손인 김형규(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2년 3세 때 부친상을 당해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 영민하고 용력이 뛰어났다. 1902년 13세 때 형 경진(景鎭)이 김덕규(金德圭)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떠난 후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게 되었다. 이 해에 오숙근(吳淑根)과 결혼하였다.

1905년 16세에 가노를 해방하고, 집안의 노비를 모아놓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의 전답을 분배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무관학교(大韓帝國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07년 18세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가산을 팔아 호명학교(湖明學校) 설립하고, 지방 청년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호명학교는 호서지역을 널리 밝게 한다는 뜻이다.

이 해에 다시 상경하여 노백린(盧伯麟)·윤치성(尹致晟)등과 함께 조직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홍성(洪城)에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설치하고 민중의 계몽에 노력하는 한편 1909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설하여 지방에 있는 유능한 자제를 뽑아 서울에 유학케 하였다.

1910년에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였을 때 서울에 이창양행(怡昌洋行)이란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집합처로 삼는 한편 신의주에는 염직회사를 차려 남북만주와 연락하는 비밀기관으로 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6월 징역 2년형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13년 24세 때 서대문형무소 출감하여, 홍주로 귀향하였다.

1915년에는 노백린·신현대(申鉉大)·윤홍중(尹洪重)·박성태(朴性泰)·기명섭(奇明燮)·김홍두(金弘斗)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이 주도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참가하여 국내 각지를 통하여 항일운동에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西大門)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 혁명기지 건설, 친일부호 처단, 무기구입, 독립군 양성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1917년 3월 대한광복회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대한광복회 만주 부사령으로 만주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초 대한광복회 조직이 일제에 의해 와해하였는데, 만주에 있어 체포를 면했다.

30세가 된 1919년 초 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인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서 일(徐一)·여 준(呂準)·정 신(鄭信)·유동열(柳東說)·신팔균(申八均) 등 38인과 함께 서명하여 발표하였다.

이 해 8월 7일에는 서 일·현천묵(玄天默)·계 화(桂和)·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圭植)·이범석(李範奭)·조성환(曺成煥)·박성태·정 신·김찬수(金燦洙)·박두희(朴斗熙)·홍충희(洪忠熹)·이홍해(李鴻來)·윤창현(尹昌鉉)·나중소(羅仲昭)·김 성(金星) 등과 함께 정의단(正義團)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임전태세의 군정부(軍政府)를 편성하고 그는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 겸 간북총판국(墾北總辦局) 재무참사(財務參事)로 일하였다.

1920년 2월초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十里坪)에 독립군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한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했다. 사관연성소의 총책임은 사령관인 김좌진 교관으로는 이범석(李範奭)·김규식(金奎植) 등이 훈련을 담당했다.

이 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 군대의 특별한 호의로 동북만주의 독립군 부대는 노령해삼위(露領海蔘威)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 많은 군자금과 무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 육군성(陸軍省)은 중국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하는 한편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다가 남하하는 일본군 제19사단과 나남(羅南) 제20사단에 명령하여 북로군정서를 협공하게 하였다.

이에 김좌진은 백두산으로 들어가서 좀 더 독립군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 청산리(靑山里)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3대대가 무산(茂山)으로부터 습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곧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10월 18일에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전방 삼림속 유리한 전투지점에 독립군을 매복하여 일본군의 내습을 대기하고 편의대(便衣隊)로 하여금 적의 병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적진 부근의 동포를 통해 독립군의 병력은 미약하고 투지가 없다는 정보를 흘려 적이 독립군을 경시하게 하였다. 독립군을 2개 중대로 편성하여 제1중대는 김좌진이 직접 지휘하고 제2중대는 연성대장(鍊成隊長)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병력이 보잘 것 없다는 말을 듣고 동월 20일 의기양양하게 청산리를 3면으로 포위하고 기병대 일부를 동원하여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백운평 삼림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김좌진은 주도면밀한 작전지휘로 백운평 전방에 매복한 독립군에게 일제 사격을 명령하여 적의 전위부대를 전멸하였다.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청산리대첩을 이루었다. 계속적인 전투로 일본군 가납(加納) 연대장을 비롯하여 3,300여명을 섬멸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소수의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일군을 물리친 전사상(戰史上) 보기 드문 대승리였다.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독립군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을 북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적의 실패와 아군의 승전’로 나누어 독립군의 승리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번 전투에 백반의 승산을 유有한 적은 하何로 인하여 반反히 대패를 초招하였으며, 백반을 준비가 부족한 아군은 능히 승전을 득得하였는지 차此를 약진略陳함.

적의 실패 이유

1. 병가에서 가장 기피하는 것은 경적輕敵하는 행위로 험곡장림險谷長林을 별로 수색도 경계도 없이 맹진盲進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을 당한 것.

2. 국지전술局地戰術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산림과 산지 중에서 종종의 자상충돌自相衝突을 낳은 것.

3. 일본군인의 염전심厭戰心과 피사도생避死圖生하는 겁나심怯懦心은 그 도에 달하여 군기軍紀가 문란하며 사법射法이 정확하지 못하여 1발의 효과도 없는 난사를 행한 뿐인 것.

독립군의 승전 이유

1.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용결투奮勇決鬪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심기를 압도한 것.

2. 양호안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한 준비를 하여 사격성능을 극도로 발휘한 것.

3. 임기응변의 전술과 예민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에서 벗어나서 뛰어난 것.”

청산리독립전쟁은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강점당한 우리 민족이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건설한 한인사회와 이를 바탕으로 민족적 역량을 통합함으로서 이룩한 빛나는 승리였다.

김좌진은 이곳 주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부하들을 인솔하고 밀산(密山)으로 이동, 밀산에 집결한 10개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1년 북만지역에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다. 전 독립군을 인솔하고 노령(露領) 이만으로 건너갔다가 뒤에 자유시(自由市)로 다시 이동했다. 1922년에는 소련당국의 배신으로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고, 이후 북만주 영안(寧安)으로 탈출하였다.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재결성하여 사령관에 취임했다.

1925년 3월 15일에는 김 혁(金赫)·최 호(崔灝)·나중소(羅仲昭)·조성환·박성태·유정근(柳正根)·허 빈(許斌)·정 신·이일세(李一世) 등과 함께 전 북로군정서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으며, 김좌진은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총사령으로서 보안대와 별동대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부교장으로서 교장 김 혁 등과 아울러 독립군 간부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동년 10월 10일에는 상해(上海)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그를 임시정부 국무원(國務員)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고 계속하여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며 대일 항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7년 2월 신민부 본부가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 김 혁 이하 12명의 간부가 체포되었다. 이에 김좌진은 신민부를 재정비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신민부를 통할하는 한편 중국구국군사령관(中國救國軍司令官) 양우일(楊宇一)과 회담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그해 동년 8월에 중국 국민당 동삼성공작책임자 공패성(貢沛誠)·장령(將領) 악유준(岳維峻)·사가헌(史可軒) 등과 회동하여 한·중 연합군(韓中聯合軍)을 조직하고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던 중 일제의 압력을 받은 장작림(張作霖)이 공패성·사가헌·악유준 등을 체포하고 탄압함으로써 좌절되었다. 1928년에는 참의부(參議府)·신민부·정의부(正義府)의 3개 단체통합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으나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실패하고 혁신의회(革新議會)만을 구성하였다.

1929년에는 정 신·민 무(閔武)·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유운초(劉雲樵)·한규범(韓奎範)·이종주(李鍾柱)·조각산(趙覺山)·이 달(李達) 등과 함께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주석(主席)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영안현 일대의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중동선 산시역(山市驛) 부근에 정미소를 설치하고 그해 12월 25일(음) 정미소에서 작업을 하던 중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종전의 부하이며 일제 고등경찰에게 포섭되었던 김일성(金一星)의 교사를 받은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청년회원이며 재중청년동맹원(在中靑年同盟員)인 박상실(朴尙實)이 등 뒤에서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이때 나이 41세.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 민족의 큰 별이던 그는 이 뼈아픈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1931년 2월 13일(음) 사회장으로 산시역 칠가둔 북쪽 산에 안장됐다. 1934년 4월 9일(음) 부인 오숙근 여사에 의해 유해를 고국으로 운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하였다. 1957년 1월 15일(음) 오숙근 여사가 사망하자 장군의 유해와 함께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번지에 합장하였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홍성군은 1991년부터 김좌진장군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했다. 또한 김좌진장군 사당은 1998~2001년까지 성역화사업 추진으로 2,88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내·외삼문, 재실,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으며, 매년 10월에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홍성군은 1991년부터 김좌진장군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했다. 또한 김좌진장군 사당은 1998~2001년 성역화 사업으로 추진하여 2,80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내·외삼문, 재실,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으며, 매년 10월에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축제를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