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회장 김원웅),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과 공동으로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尹山溫, 1873.12.15~1941.12.4) 선생을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은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조지 새넌 맥큔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를 2월1일부터 29일까지 한 달 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 6관 통로)에서 개최한다. 이 전시에서는 조지 새넌 맥큔 사진 등 8점을 볼 수 있다.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새넌 맥큔(숭실전문학교 교장).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선생을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새넌 맥큔(숭실전문학교 교장).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선생을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조지 새넌 맥큔은 1873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미주리 주립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1905년 5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5년 9월 아내 헬렌 베일리 맥아피(Helen Bailey McAfee)와 함께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평양선교지부에 배치된 선생은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숭실학교(崇實學校)의 교장인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를 도와 한국인 학생을 가르치며 숭실학교와 교회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평북 선천선교지부로 전임하여 중학교 과정인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장을 맡아 학생들의 자립과 자조를 위한 실업교육을 강화하였다. 1911년 10월 일제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구속되었다. 선생은 자신도 105인 사건의 연루자로 일제의 감시를 받게되었다. 선생은 이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 사건을 미국 선교 본부에 바로 보고하고 일제의 무단통치 실상을 외국 언론에 알려 재판이 일제의 의도대로 진행될 수 없게 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일본 경찰의 가택 수색을 거부하며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않게 보호하였다. 선생은 또한 일제의 강경한 탄압 사실과 운동의 의의를 알리기 위해 직접 운동 내용을 적어 여행가는 외국인에게 편지로 맡겨 검열을 피하고,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The Continent)』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하였다.

105인 사건 판결문 필사본. 1911년 일제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에 신성학교 교장인 조지 새넌 맥큔을 비롯하여 학생·교직원 등이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사진=독립기념관]
105인 사건 판결문 필사본. 1911년 일제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에 신성학교 교장인 조지 새넌 맥큔을 비롯하여 학생·교직원 등이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사진=독립기념관]

또한 3.1운동의 발판이 된 2.8 독립선언서 영문 번역문을 오산학교 시절 인연으로 이광수의 부탁을 받아 교정해주었다. 3.1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한 세브란스 의전 학생인 김원벽(金元壁)을 만나 독립운동을 격려하는 등 3.1운동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많이 주었다.

이뿐 아니라 1920년 9월 1일 방한한 미국 의원단에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보이기 위해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광복군총영 소속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朴治毅)가 사형판결을 받게 되자 이를 변호하였다.

이런 선생의 활동에 일제는 끊임없이 감시와 탄압을 시작했고 결국 1921년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28년 다시 돌아와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1930년부터 일제는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선생이 있는 숭실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기독교 사목과 목적에 맞지 않는다면서 계속 거부의사를 표명하며 일제의 탄압에 맞섰다.

신한민보 '윤산온 편지는캐나다를 경하야' 조지 새넌 맥큔 선생(한국명, 윤산온尹山溫)은  3·1운동 당시 자신이 목격한 일제의 탄압을 미국 『컨티넨트The Continent』잡지에 게재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신한민보 '윤산온 편지는캐나다를 경하야' 조지 새넌 맥큔 선생(한국명, 윤산온尹山溫)은 3·1운동 당시 자신이 목격한 일제의 탄압을 미국 『컨티넨트The Continent』잡지에 게재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결국 1936년 1월 18일자로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최종 서면으로 답변함으로써 그날로 숭실학교 교장과, 1월 20일 숭실전문학교 교장 직위를 취소당했다.

1936년 4월 선생은 안식년을 이유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도 계속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비판하는 강연과 논설 기고 등을 지속해 나갔다. 또한 재미 유학생 단체인 북미대한인학생회(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North America) 자문위원을 맡아서 계속 독립운동을 지원해 나갔다. 1941년 12월 4일 시카고 장로회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처럼 선생은 외국인으로서 3․1운동 지원, 신사참배 거부 운동 등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 인재양성에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