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내고, 한국독립당 창당하고 삼균주의의 독립국가를 꿈꾸었던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을 기리는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가 9월 10일(월)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렸다.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을 기리는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가 10일(월)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렸다. [사진=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을 기리는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가 10일(월)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렸다. [사진=국가보훈처]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위원회(회장 이종걸)에서 주관한 이날 추모제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일반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위원회장의 추모식사, 참석 내빈의 추모사, 추모강연 추모공연, 유족 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사)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이종걸 의원이 추모식,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추모사, 이종찬 국립임시정부관건립추진위원장이 추모강연을 했다. 또 김초혜 시인이 헌시를 낭독했다.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를 맞아 (사)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주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조소앙 선생의 숭고한 위업을 기리고, 조소앙 선생 가문의 항일운동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사업을 전개해 갈 예정이다.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위원회(회장 이종걸)에서 주관한 이날 추모제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일반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위원회(회장 이종걸)에서 주관한 이날 추모제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일반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조소앙 선생(1887.4.∼1958.9.)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익히고 성균관에서 수학한 뒤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했다.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신학교·양정의숙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였다. 이후 박달학원·신아동제사·대동당을 결성하여 활동하고, 1917년 대동단결선언과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에서 국무원 비서장·외무부장, 임시의정원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부장 재임시에는 중국·미국·영국 등 연합국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10일 열린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10일 열린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1920년대 후반 삼균주의를 창안하여 독립운동의 대동단결 이념과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으로 정립시켰고, 1930년 상해 한국독립당을 비롯하여 1935년 재건 한국독립당, 1940년 중경 한국독립당의 창당위원장 및 부위원장을 맡아 임시정부를 지지 후원하였다.

1941년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하여 광복 이후 국가건설의 대강을 세웠으며, 해방 이후 자주통일 민족국가건설에 애쓰다 6·25전쟁 중 납북되어 1958년 서거하였다. 조소앙 선생은 지난 1989년 임시정부 활동 등의 공로로 대한민국장을 서훈받았다.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에서 (오른쪽부터) 이종걸 (사)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국회 조경태 의원, 조성래 의원이 추모를 하고 있다. [사진=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에서 (오른쪽부터) 이종걸 (사)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국회 조경태 의원, 조성래 의원이 추모를 하고 있다. [사진=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한편 조소앙선생 가문은 6형제, 부인, 자녀 등 총 14명이 독립운동 포상을 받은 독립명문가이다.

그의 형 조용하 선생(1977, 독립장)은 조소앙선생(1887.4.∼1958.9.)은 901년 대한제국의 주독(駐獨), 주불(駐佛) 공사관 참사관, 귀국 후 이천군수 등 지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북경으로 망명하여 항일활동을 하였다.

1913년 도미하여 박용만과 같이 하와이에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Korean Independence League)을 조직, 1920년 7월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지단장에 선출되어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발행하고, 친동생인 상해임시정부 외무총장 조소앙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며 외교 및 홍보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조소앙으로부터 중한동맹회 조직의 선언 및 입회용지의 송달을 받고 하와이 재류 동지를 권유하여 가입시켰으며, 임시정부와 유대를 갖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해 10월에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하여 미국 기선 프레지던트 후우버호를 타고 상해로 가던 도중 일본 고베에 기항하였다가 이 정보를 입수한 일경에게 체포됐다. 1933년 1월 서울로 압송되어 1933년 4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고,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1937년 3월에 서거했다.

첫째 동생 조용주(趙鏞周 : 1891-1937, 애국장(1991))는 1913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친형인 조소앙과 힘을 합쳐 상해에서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당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6년에는 상해에서 대동당의 결성을 주도,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때에도 조소앙의 활동을 도왔다.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10일 열린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에서 김초혜 시인이 헌시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10일 열린 ‘조소앙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에서 김초혜 시인이 헌시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길림에 있던 그는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에 참여하고, 다시 상해로 넘어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을 기초했다. 1919년 5월 조소앙이 국제무대에서의 외교활동을 위해 구주로 떠나기 전 4월 말경에 외교활동을 지원할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했다.

1919년 5월에 서울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독립정신의 보급 및 선전과 아울러 세계 각국에 외교원을 파견하여 독립 실현을 보장받는 데 목표를 두었다. 국내의 각처와 국외의 상해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소앙의 외교활동을 지원하고, 선전활동을 했다.

이때 조용주는 동단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는 한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자매단체인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혈성단애국부인회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발전·개편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그는 상해와 국내를 왕래하며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활동을 지도하다가 1919년 11월말 동 단체의 발각으로 피체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조소앙 선생의 둘째 동생 조용한(趙鏞漢 : 1894-1935, 애국장(1990))은 1920년 음력 12월 20일경 김홍제·오인영과 함께 독립군자금을 모집한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완구용 권총 한자루를 구입한 다음 중국 동삼성 소재 서로군정서 명의의 인장을 조각하여 군자금 영수증서를 작성하고 수원·안성·진위 등지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오인영을 방문하러 가던 중 일경에게 피체됐다.

1921년 5월 5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및 강도예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그해 6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룬 후, 1928년 5월 중국 상해로 도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친형 조용은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여동생 조용제(1990, 애국장)는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군자금 모집에 앞장서고, 한국혁명여성동맹의 창립 요원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가 자녀들에게 우리말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막내 동생 조시원(1963, 독립장)은 한국광복군 창설 후 광복군 총사령부 부관 및 군법실장을 역임하며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창당 직후 개최된 중앙집행위원회 기념사진.           앞줄 우측에서 두 번째가 조소앙, 네 번째가 김구, 뒷줄 우측에서 다섯 번째가  조시원이다. [사진=국가보훈처]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창당 직후 개최된 중앙집행위원회 기념사진. 앞줄 우측에서 두 번째가 조소앙, 네 번째가 김구, 뒷줄 우측에서 다섯 번째가 조시원이다. [사진=국가보훈처]

또한 그의 아들 조인제(1963, 독립장)는 일찍이 부친 조소앙을 따라 중국 사천성 중경에서 동구대학을 졸업했다. 1935년에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 분교에서 정치 훈련과 전술 및 내무, 교양관계의 학과를 수료하고, 1938년 5월에는 중국 중앙군 제45사대위로 임명되어 복무했다.

1940년 9월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광복군에 입대하였으며, 11월에 광복군 총사령부가 중경에서 서안으로 이동됨에 따라 서안에서 총사령부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2월에는 광복군 제1지대의 간부로 임명되어 임지인 산서성 방면으로 전진, 추림현 극란파에 주둔하고 있는 산서성 주석이며 중국군 제2전구 사령장관인 염석산에게 광복군 전방공작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는 총사령부 공문을 전달하여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산서성 북부 대동을 중심으로 하여 적 점령하에 있는 태원, 석가장 등의 주요 도시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를 대상으로 초모, 선전, 첩보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중국 유격대와 협조하여 유격전에 가담했다.

1942년 10월에는 다시 총사령부에 복귀하여 서무과에 근무,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인사과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광복시까지 광복군 참령으로 총사령부에 계속 복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