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경환(曺京煥, 1876. 2. 14.~1909. 1.10.) 선생을 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조경환 선생은 1876년 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시대의 전환기에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20세기 초반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며 조국의 현실을 목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차려 후학을 육성했다.

선생은 1906년 태인에서 을사늑약에 반발해 최익현과 임병찬 등 순창 12의사가 의병을 일으켰으나 서울로 압송되었고,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순국했는 소식을 들었다. 1907년 후반 재차 호남지방에서 기삼연과 김준 등이 고창읍성을 점령하는 등 맹활약을 떨치자 선생은 그 해 12월 중순 김준 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조경환 의병장 초상화. [사진=국가보훈처]
조경환 의병장 초상화. [사진=국가보훈처]

선생은 김준 의진에서 좌익장을 맡아 함평읍, 창평 무동촌(茂洞村), 장성 낭월산(浪月山), 영광 월암산(月岩山), 광주 어등산(魚登山) 등 수많은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908년 음력 3월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의병장 김준이 순국하고,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함평 당산촌 나평집(羅平集)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했다. 일본군의 진압작전이 종료되고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모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때 전북 이석용(李錫庸) 의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과 연합하여 용진산(聳珍山)에서 200여명 규모로 의진을 재편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의병장이 된 선생은 어등산에서 김준 의병장의 장례를 치르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곧 용진산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광주 흑석(黑石)에 있는 일본군 순사대를 공격하며 의병장으로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했다.

조경환 의진은 100~200명 내외의 군세를 형성하여 전남 광주, 함평, 영광, 장성, 담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다. 의진은 일본제 30년식 보병총과 기병총 4정, 한병총(韓兵銃) 12정, 천보포(千步砲) 8문, 개조 화승총 약 60정 등의 열악한 무기로 일본군경과 맞서 싸웠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경환(曺京煥) 선생을 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포스터=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경환(曺京煥) 선생을 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포스터=국가보훈처]

1909년 1월 혹한기를 맞아 대부분의 부하를 일시 귀향시키고, 귀가하지 않은 50여명과 함께 어등산에 주둔했다. 그러나 의진은 일본군 광주수비군에게 주둔 사실이 탐지되었다.

1909년 1월 10일(음력 1908년 12월 19일) 조경환 의진은 야마다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 20명, 체포 10명의 피해를 입었다. 선생은 총탄을 맞고서도 부하들의 명단을 불사르고 어등산 전장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조경환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