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미상~1945. 8. 14.) 선생을 2018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유상근 선생은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 10세 되던 해 통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3년 가족이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함에 따라 길림성 연길현 이도구(吉林省 延吉縣 二道溝)로 들어갔다가 다시 봉밀구 갑산촌(蜂密溝 甲山村)으로 옮겨 약 1년 반 동안 거주하며 농사를 지었다. 16세 때에 다시 용정촌(龍井村)으로 옮겨 동흥중학교에서 1년간 수업하다가 가정형편으로 중도 포기하고 야학(夜學)을 설치하여 거류동포들의 계몽 사업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화룡현(和龍縣)으로 이사하여 19세 때에는 하얼빈에 있는 이모부 이종익(李鍾翊)의 집에 거주하게 되었다. 21세가 된 1930년 이모부에게서 약간의 노자를 얻어 하얼빈을 떠나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일원인 백범 김구(白凡 金九)를 만났다. 백범의 소개로 우선 영국인 경영의 버스회사의 검표원으로 생활하면서 자주 백범을 찾아 독립운동의 방략을 듣고 헌신·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2018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유상근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2018년 12월의 독립운동가 유상근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선생은 또한 인삼 행상으로 광동(廣東)·홍콩(香港) 등지를 두루 다니기도 하였다. 1932년 봄에 다시 상해로 돌아가 백범이 단장으로 있던 한국 교민단(僑民團)의 의경대원(義警隊員)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이 무렵 중국정부는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침략한 일본을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국제연맹은 릿튼(Lytton)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조사단은 5월 26일부터 다롄(大連)에 오게 되었다.

백범이 주관하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본국과 다롄에 단원을 파견하여 조사단이 보는 앞에서 일제 고관들을 폭살하여 우리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기로 결정하고 선생을 선발하였다. 1932년 1~2월경 김구의 부름으로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2월 24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했고, 4월 27일 윤봉길의사가 홍커우공원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폭탄을 들고 다롄으로 갔다.

5월 4일 상해를 떠나 다롄으로 가서 아옥정(兒玉町)에 있는 만철(滿鐵) 기숙사 안 어느 동포의 방에 은거하면서 연락책임을 맡은 최흥식(崔興植), 무기 반입 등의 책임을 맡은 이성원(李盛元)·이성발(李盛發) 등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였다. 동월 24일 거사를 이틀 앞두고 다롄우체국에서의 비밀 전문(電文)이 단서가 되어 최흥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그와 이성원·이성발 등도 차례로 체포되었다.

선생은 다롄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예비, 폭발물취체규칙 위반’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2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여순(旅順) 감옥으로 이감되어 1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4일, 옥중에서 일제에 의해 참살을 당하여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유상근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