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에 위치한 봉오동에서 독립군의 연합 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당시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홍범도 장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해 큰 공을 세웠다.

일제의 핍박 속에 실낱같은 독립의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싸워 독립의 의지를 겨레에 펼친 홍범도 장군이 어느덧 탄생 150주년을 맞이했다. (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우원식, 이하 기념사업회)은 12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홍범도장군 탄생 15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기념식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우원식 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종찬 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이종걸 국회의원, 바킷 듀센바에프 주한 카자흐스탄 대사를 비롯해 기념사업회 회원과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12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기념사업회 회원과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12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기념사업회 회원과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이날 기념식은 ‘대한독립군 총사령광 홍범도 장군’ 다큐멘터리 상영으로 시작되었다. 우원식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으로서 가장 치열하고,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던 민족의 영웅이었고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 수많은 업적을 세우고도 독립운동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복원하고, 현대사에 기록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삶을 기리는 일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우원식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복원하고, 현대사에 기록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삶을 기리는 일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우원식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복원하고, 현대사에 기록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삶을 기리는 일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홍범도 장군은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먼저 생각하며 의병활동을 계속 해나가셨다. 또한, 독립군을 이끄는 리더로서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리더가 무엇인지 보여준 홍범도 장군의 고귀한 독립정신을 더욱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치사를 전했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치사를 통해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치사를 통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이 홍범도 장군의 리더십을 배우고 그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뒤이어 이종찬 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을 비롯해 이종걸 국회의원과 바킷 듀센바에프 주한 카자흐스탄 대사, 그리고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축사를 했다. 이후 조환래 홍범도함 함장이 홍범도 장군에게 쓴 편지를 김기혁 부함장이 낭독했으며, 이동순 영남대학교 명예교수가 축시를 낭독했다. 또한 역사어린이합창단과 노원구립여성합창단의 축가와 함께 참가자 전원이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며 기념식이 마무리 되었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홍범도장군께 보내는 편지'를 비롯해 축시와 축가를 통해 홍범도 장군의 탄생 150주년을 축하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이날 기념식에서는 '홍범도장군께 보내는 편지'를 비롯해 축시와 축가를 통해 홍범도 장군의 탄생 150주년을 축하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1868년 평안북도 양덕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1895년부터 의병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투쟁했다. 이후 1907년 일제가 총포화약류단속법을 시행하자 갑산에서 항일의병대를 조직해 함경도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섬멸했다. 

1910년에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국권 침탈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다음 해 부하 박영신으로 하여금 함경북도 경원의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된 그는 400여 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감산과 혜산, 자성 일대의 일본군을 급습해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듬해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해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기억하는 봉오동 전투는 이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같은 해 9월 청산리 대첩에서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스보보드니, Svobodny)로 이동해 수랍스카 부근에 주둔하며 레닌 정부의 협조로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 해제와 독립운동 진영 간 군권 다툼으로 빚어진 자유시참변을 겪고 러시아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 1943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홍범도 장군의 공훈을 기리고자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