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8일 오후 도문-연길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간 곳은 도문시 봉오동. 1920년 6월 무장항일독립군이 일본정규군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둔 현장이다. 당시에는 왕청현에 속했으나 지금은 도문시에 속한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4일 시작되어 6월 7일에 끝났다. 이는 항일무장독립군이 만주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첫 번째 큰 전투였고 또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우리는 봉오동반일전적지 기념비 앞으로 갔다. 오른쪽 골짜기가 봉오동전투 현장이라는 데  볼 수 없다. 중국이 이곳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봉오동반일전적지를 알리는 기념비도 저수지관리소  안에 있어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봉오동전적지 기념비는 전에 있던 것 대신 새로 세웠다.

봉오동 전투는 무장항일독립군이 연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920년 5월 7일 홍범도, 고평(高平), 최명록(일명 최진동), 리영근 등은 봉오동에서 군무도독부, 북로군정서, 국민회, 신민단, 정의단, 광복단, 의군부 등 항일무장독립군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만주로 침략해 들어오는 일본군에 대응 전략을 논의했는데 각개 전투는 승산이 없고 연합작전을 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 1920년 6월 항일무장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봉오동전투를 기념하는 봉오동전적비.

회의에 참가한 서일, 김좌진, 홍범도 등은 이러한 의견을 같이하고 홍범도, 최명록, 안무 세 장군이 영도하는 연합독립군을 형성했다. 사령 겸 부장에는 홍범도, 부장에는 최명록, 부부장에는 안무가 임명되었다. 회의 후 그들은 주력부대를 봉오동에 집결하여 싸울 준비를 하였다. (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민족출판사, 1999).

우리는 전적지 기념비 앞에 서서 봉오동전투에 참가한 독립투사를 비롯한 모든 선열에게 묵념을 올렸다. 전적지 기념비는 가운데에 ‘봉오골반일전적지’라는 글을 왼쪽에는 중국어로, 오른쪽에는 한국어로 새겼고 양 옆으로 ‘봉오동반일전적지’에 관한 안내문을 왼쪽에는 한국어, 오른쪽에는 중국어로 새겼다. 
 
“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사령으로 한 조선민족독립운동 대한북로독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벽곡 봉오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일본군 19 사단 소속부대, 아라요시 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폈다. 반일 독립군은 빈틈없이 매복전을 쳐놓고 있다가 오후 한시경 일본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본군 150여명을 사살하고 10명을 부상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변반일무장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침략자들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 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북돋아주었다.
우리는 이 전적지의 참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여 이 비문을 새긴다. "

▲ 봉오동전적비 앞에서 항일애국투사를 위한 묵념을 올렸다.

‘봉오동반일전적지’ 내용을 읽고 기념비를 한 바퀴 돌아 살펴보았다. 이 봉오동반일전적지는 2007년 12월20일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가 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하였고 2013년 6월에 도문시인민정부가 이 기념비를 세웠다.
그 이전에는 작은 비석으로 이곳이 봉오동반일전적지임을 알렸다. 1993년 6월 7일 중공도문시위통정부, 도문시박물관, 도문시수도공사가 세운 기념비가 들판에 방치되어 있다. 기념비 내용은 새로 세운 기념비와 거의 동일하다. 1993년은 한중수교 다음해이다. 한국관광객이 중국을 찾기 시작할 무렵, 이곳이 봉오동전적지임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70년 넘게 중국 현지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봉오동전투 역사가 한중 수교로 빛을 본 셈이다.
▲ 봉오동전적비 앞에서 당시 정세와 전투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임찬경 박사와 정길영 박사의 설명을 통해 봉오동 전투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이 점차 무장투쟁으로 바뀌었다. 일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중국 정부에 반일무장단체의 활동을 저지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당시 만주의 실력자 장작림(張作霖)과 결탁하여 반일무장단체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또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을 만주로 동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항일무장독립군의 위세를 과시하고 항일투쟁 의지를 다진 쾌거였다.
▲ 이전에 세운 봉오동전적비도 현장에 남아 있어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홍범도 장군. '반일명장'이라는 비문의 평가에 홀연 처연한 느낌이 든다. 국가보훈처가 1987년 펴낸 '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4권에는 홍범도 장군의 공훈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 를 비롯하여 국가보훈처의 자료 등을  토대로 봉오동전투 이후 그 행적을 더듬었다.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국민회가 독립군 부대를 재연합하여 창설한 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 사령관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靑山里) 대첩에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崔振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다. 홍범도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는 물론 마적과도 싸웠다. 홍범도 장군이 김좌진 등의 부대와 연합하기 위해 청산리로 가던 도중에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많은 전과를 거두었지만, 홍범도 부대 또한 손실을 많이 입었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밀산(密山)지역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조직을 총망라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되어 총재인 서일(徐一)을 보필하였다. 그후 노령(露領)지역으로 이동한 독립군단은 자유시(自由市)를 근거지로 삼고 소련군과 긴밀한 접촉을 하였다.
1921년 러시아령(領) 자유시(自由市, 스보보드니)로 이동하여 수랍스카 부근에 주둔하여 레닌 정부의 협조로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그해 6월 소련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은 무장이 해제되고  독립운동 진영 간 군권 다툼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을 겪고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1922년 6월 한국혁명군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하여 브라고에스첸스크에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이 조직되자, 홍범도 장군은  최진동・허근(許根)・안무(安武) 등과 함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3년 5월경에는 연해주 이만에서 김좌진・이청천・김규식・안무 등과 함께 조선독립단 군정서의회를 열고 독립군 모집, 무기・군복・양식 등의 보급 및 국내진입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체제가 확고하여짐에 따라 이용가치가 없어진 독립군 간부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다시 여러 방면으로 분산되고 말았다.

이후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어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43년 홍범도 장군 사망 후 1982년 한글신문인 '레닌기치' 기자들을 중심으로 고려인들이 앞장서서 지금의 묘지 중앙으로 이장하였다. 중앙아시아 한인들과 정부의 협조로 크질오르다 중앙묘역의 홍범도장군 흉상을 새로 단장하였다. 흉상 주변에는 1937년의 강제이주, 1995년의 광복 50주년, 1997년의 강제이주 60주년 등을 기념하는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홍범도 장군의 묘비는  공동묘지 입구에서 바로 보일 정도로 잘 꾸며져 있다.

국내에서는 (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가 해마다 추모식을 거행한다. 비록 저수지가 되었지만 봉오동 전투 전적지는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고 우리는 연길로 발길을 돌렸다. 연길에 도착하여 곧바로 서점에 들러  연변 관련 자료를 세 권 구입하였다. 다른 짐은 줄어드는 대신 책이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