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일 수요일 오후 모두루묘를 떠나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비석이 있는 곳으로 가는 초입은 관광지로 기념품 상가가 조성되어 있었다. ‘관광상품기념상품점’이라는 한자와 한글을 나란히 쓴 간판이 우리를 반겼다. ‘아이스크림 천원에 다섯 개’라는 펼침막을 내건 천막에는 아이스크림 통만 서너 개 있을 뿐, 파는 사람도 없다. 평일이라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아서일까. 버스 수십 대를 세울 만한 주차장이 텅 비어있다.

왼쪽으로 광개토대왕비를 향해 내려간다.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부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 하는 것이다. 가슴이 설렌다.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태왕(太王), 대륙을 호령한 임금, 그 임금을 기리는 비석, 광개토대왕비를 직접 대면한다. 이 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왕 2년(414년)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도읍인 국내성,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 통구성에 세웠다. 높이는 6.39미터로 한국 최대의 크기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를 새겼다. 

▲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비각으로 보호하였다.
 

비각에 다가갈수록 가슴이 벅차다. 비각을 세워 비석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할까 조바심을 냈는데 측면에 문이 있어 앞으로 들어간다. 여 안내원이 우리를 맞아준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비석, 전면이 검은데 그 사면에 한자가 촘촘히 들어섰다. 1,60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보낸 비.
‘저게 광개토대왕의 업적이고, 고구려의 역사이구나!’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얼굴이 머릿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고, 일본인들의 모습이 스친다. 광개토대왕비는 일본과 불가분의 연관이 있다. 비문 가운데 이른바 신묘년 기사를 일본은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함으로써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이 나오게 되었다.

▲ 광개토대왕비는 비각 안으로 들어가 관람할 수 있지만, 사진 촬영은 할 수 없다.

고구려의 땅을 잃지 않고 이 비석의 존재를 일찍이 알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다.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기록은 최초 고려말의 문헌기록에 나타나고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몇몇 문헌에 언급되었지만, 조선 후기까지 비문을 직접 확인한 적은 없다. 조선에서는 비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이를 무심히 관망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고 ‘광개토왕비의 신화’를 펴낸 권오엽 교수는 아쉬워한다.

비가 발견된 것은 청(淸)의 만주에 대한 봉금(封禁)이 해제된 이후 일이다. 만주족인 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를 거주금지지역으로 정했는데 집안 일대도 그에 포함됐다. 1877년 청나라 광서 3년,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비석만이 있었으나 1928년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 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다고 전한다. 1982년 중국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각 안에서는 사진을 촬영할 수 없다.  안내원은 중국인을 상대로 광개토대왕비를 설명한다. 우리는 임찬경 박사의 설명을 들었다.

비가 발견되자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초기 탁본은 대체로 쌍구가묵법(雙鉤加墨法)으로 얻었다. 쌍구가묵법?  쌍구가묵법은 원작의 윤곽을 그대로 베껴 떠낸 뒤 먹을 칠하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광개토대왕비 위에 종이를 붙여 나타난 윤곽대로 그려낸 뒤 먹을 가하여 탁본은 만들었다는 것이다. 붓글씨 연습을 할 때 아래 글씨가 다 보이는 습자지를 위에 놓고 그대로 글씨를 썼던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는 정교한 탁본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좀 더 정교한 탁본을 얻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에 낀 이끼를 제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또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알 수 없게 된 글자로 인해 연구에 논란이 되었다. 
 

▲ 옆에서 본 광개토대왕비.

비석은 오직 눈으로만 볼 뿐이어서 주위를 한 바퀴 돌아 4면 전체를 살펴보았다. 비석의 탁본은 이날 오전 집안박물관에서 보았다.
비석의 주인공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고국양왕(故國讓王)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談德)이었다. 광개토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生而雄偉, 有倜儻之志)
서기 391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이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 정벌에 나섰다. 그해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고 9월 북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00명을 생포하고,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오는 그 관미성.
2년 가을 8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하자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3년 가을 7월 백제가 침략하자, 왕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쳐서 그들을 패배시켰다.
8월 남쪽 지역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4년 가을 8월 왕이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패배시켰다.
11년 왕이 군사를 보내 연 나라의 수비군을 공격하였다. 13년 겨울 11월 군사를 내어 연 나라를 공격하였다.
17년 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정의를 나누었다. 18년 가을 7월 동쪽 지방에 독산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왕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22년 겨울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비문에는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광개토대왕 재위 22년, 고구려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고 군사력이 최강이었다. 비문에는 “무위가 천하에 떨치고,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작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 광개토대왕릉, 비석이 있는 일대는 관광지로 상가가 조성되어 있다.

중국은 호태왕비를 현존 최고(最古), 문자가 가장 많은 고구려 고고사료로 중시하고 있다. 고구려의 중심문물로 동북아 고고유적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고유문자가 없고 광개토대왕비문 또한 죄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중화왕조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지방정권이라고 덧칠한다. 
 

광개토대왕비각을 나와 주변을 돌아보며, 비석을 세울 무렵 번화했을 국내성을 상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