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씨가 점차 흐려졌다. 7월17일 오후 청산리대첩기념비를 뒤로 하고 동으로 대종교 삼종사 묘역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졌다.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 삼종사 묘역 안내판 앞에서 임찬경 박사가 삼종사에 관해 설명을 했다.

유적 안내판 앞에 서서 임찬경 박사의 설명을 들었다. 화룡시문물단위로 지정되어 관리하는 곳이다. 안내판에는 한글과 중국어로 적어놓았다.

반일지사(나철, 서일, 김교헌) 묘역

반일지사 나철, 서일, 김교헌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계몽운동과 반일교육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사상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서일이 령도한 <북로군정서> 소속의 반일 무장부대와 <국민회> 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동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는 일본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

화룡시문화유물보호단위
화룡시인민정부 1991년 9월1일 공포

삼종사가 화룡시를 중심으로 펼친 반일 계몽운동과 교육, 독립전쟁을 잘 드러낸 안내문이다.
안내문 아래에는 두 줄로 “대한민국(사)나철선생(항일지사)선양사업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금곡”라는 글을 적은 팻말이 덧붙여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이 이곳 연변 화룡과 무슨 인연일까. 홍암 나철이 전남 보성 벌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보성 벌교에는 나철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선양사업회가 있다.

▲ 삼종사 묘역이 화룡시 청호에 들어서게 된 역사를 임찬경 박사로부터 듣고 있다.

임찬경 박사의 구수한 해설, 정길영 박사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묘역으로 올라갔다. 묘역 주위를 울타리로 막아 묘 앞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전에 묘 앞에서 봉심을 하는 이들이 많아 중국 당국이 막아놓은 모양이다. 세 분의 묘가 서쪽 화룡시 건너 청산리를 향하고 있다.

▲ 삼종사 묘역을 알리는 표석.

나철 대종사는 철종 14년(1863)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鴻巖). 29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있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의 지사를 모아 1904년 유신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동지 이기(李沂)・오기호(吳基鎬) 등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 정계 요인을 방문하여 “동양평화를 위해 한(韓)・청(淸)・일(日)이 동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에 선린의 교의로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안 매국노를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단도를 두 자루 사들고 귀국하였다.
이후 을사 오적(五賊)을 제거하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모아 수차례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1907년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그는 1908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구국운동을 했다.
나철은 국권수호를 위해 다방면에 노력을 했으나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중 민족주체성을 확립하고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단군교를 중광(重光)하였다. 그가 1904년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서 한 백발노인으로부터 책 두 권을 받았는데 ‘삼일신고’와 ‘신사기’였다고 한다. 1908년 일본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을 만나 ‘단군포명서’를 받았다. 그해 12월 두일백으로부터 나철은 영계(靈戒)를 받았다.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重光節)이라 한다. 
단군교를 중광한 나철이 포교활동을 왕성하게 벌여 단군교는 교도수가 2만여명에 달할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1910년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하고 제1세 교주에 추대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에 지사(支司)를 설치하고 총본사 이전 계획을 추진하였다. 나철은 1911년 서울을 출발하여 강화, 평양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북쪽 청파호를 답사한 후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총본사를 이전하였다. 총본사를 이전하고 청일학교(靑一學校)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시행하고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 있는 삼종사 묘. 왼쪽부터 백포 서일 종사, 홍암 나철 대종사, 무원 김교헌 종사 묘.

대종교총본사를 중국으로 이전한 나철은 총본사 산하에 사도본사(四道本司)를 설치했는데 동도본사의 책임자가 서일(徐一)종사이다.  대종교가 중국으로 총본사를 이전한 후 대종교 교도수는 30만에 달하였다고 한다. 교단을 정비한 후 나철은 서울로 돌아와 남도교구에 교단 조직과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대종교가 확장되니 일제는 탄압을 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고,  종교가 아니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본사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처하자 1916년 음력 8월14일 나철은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이튿날 조식법(調息法)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에 따라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중국 화룡시가 설치한 문물표지석.

김교헌 종사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했다. 서울에 있는 조계사는 김교헌 집안의 재산이었다. 김교헌은 말죽거리 50여만 평과 조계사 터 340간의 저택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1916년 대종교(大倧敎) 대종사 나철의 교통을 계승하여 제2대 교주가 되었다. 1917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종교의 총본사를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겼다. 그는 만주지역의 역사와 상고사에도 관심을 가져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여 만주 지역 한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8년 11월 대한독립선언서(일명:무오독립선언)에 39명중 1인으로 서명하여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총재에 서일(徐一)을 임명하여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서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1921년 11월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임시정부에서 영어에 능통한 그를  외교대표로 임명하여 파송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외교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후 독립군과 함께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여 1923년 일제의 재만동포에 대한 학살 현장을 보고 비분과 과로로 병을 얻어 영안현 남관 총본사에서 분사(憤死)하였다. 이듬해 1월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백포 서일(徐一) 종사는 어떠한 사람인가.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가 자료를 참고하면 그는 함북 경원(慶源) 출신으로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1911년 길림성 왕청현(汪淸縣)에 망명하여, 청일학교(淸一學校)・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는 등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는 대종교를 신봉하여 시교사(施敎師)로서 수년간에 걸쳐 수만 명의 교우를 얻고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 전리(典理)와 총본사 전강(典講)을 역임했다. 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指講演)’, ‘도해(圖解)’, ‘신화강의(神話講義)’, ‘진리도설(眞理圖說)’, ‘삼문일답(三門一答)’, ‘회삼경(會三經)’ 등을 저술하여 교리를 전파했다.

그는 의병을 규합하여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약 1만 5천명의 단원을 거느린 단장으로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또한 일제와 무력항쟁을 하다가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선출되어 국내 진입을 계획하였으며 본부를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에 두고 청년동지들에게 정신교육을 통하여 자주독립의식을 심어주었다.

▲ 삼종사 묘역에서 봉심을 한 후 삼종사가 걸어온 독립투쟁의 역사를 함께 되새겼다.

1918년에는 여준(呂準)・정신(鄭信)・김좌진(金左鎭)・김동삼(金東三)・손일민(孫一民)・서상용(徐相庸) 등 38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무오독립선언서는 3・1독립운동에 앞선 조국의 독립선언이 되었다. 이듬해인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계화(桂和)등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의 토대위에 군사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하기 위하여 동북만에 산재한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여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신문을 간행하여 독립사상을 격려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9년 8월에는 김좌진을 맞이하여 정의단을 개편하고 임전태세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조직하여, 본영을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두고 ‘체코’ 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을 갖추었다. 그는 군정서의 총재로서 김좌진을 총사령 겸 사관연성소 소장으로 임명하여 십리평(十里坪) 산림속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들에게 맹렬한 군사훈련을 실시한 지 1년여만에 청산리독립전쟁(靑山裏獨立戰爭)을 치르게 되어 일본군 3,300여 명을 사살하는 독립군 사상 초유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府) 총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북로군정서의 전 병력이 북만 밀산(密山)으로 옮겨갔으며, 국민회・독립군의 안무군(安武軍)・홍범도군(洪範圖軍)・광복단(光復團)・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모두 3,500명의 병력이 모두 이곳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란 대군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어 전 독립군을 지휘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군은 노령(露領) 자유시(自由市)로 이주하고, 그는 밀산현 당벽진(當壁鎭)으로 옮겨가서 다시 기회를 기다리며 군무의 여가를 타서 교서(敎書)의 저술에 전념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토비들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청년동지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나라 잃은 슬픔에 겹쳐 부하들마저 무참히 희생됨에 통탄을 금치 못하던 그는 그 이튿날 8월 27일 아침 마을 뒷산 산림속에 정좌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1927년 이곳 청파호로 이장되어 세 분 종사가 함께 백두산을 바라보고 있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삼종사 묘역에서 바라본 화룡시.

청파호는 한인이 들어와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어 현지 중국인들이 이 묘역을 보호하였고, 이들의 항일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중국 당국이 묘역을 조성하고 문물로 관리한다고 한다.

사전에 배포한 안내 자료에는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 자문하여 해답을 얻으라고 하였다. 첫째, 삼종사 묘역은 왜 백두산 천지로부터 동북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이곳 화룡시 청호에 서 있게 되었는가? 둘째, 삼종사 묘역은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가.
이 두 질문에 해답을 얻으려면 민족종교인 대종교, 대종교의 항일투쟁사를 이해해야 한다. 이 질문에 해답을 얻고 대종교 삼종사 묘역 앞에 서면 진실로 온몸으로 전해지는 역사의 음성에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안내 자료에 제시하였다.  미약하나마 나철 종사의 일대기를 알고 가니, 삼종사 묘역에서 쉽게 돌아설 수 없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는데도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없다. 굵은 빗방울이 잦아지더니 순식간에 세찬 빗줄기로 바뀐다. 그제야 발걸음을 재촉하여 삼종사 묘역을 떠나왔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빗줄기가 더욱 굵어진다.  이제 화룡을 떠나 연길(延吉)로 간다. 백두산을 가기 위해 두 번 스쳐 지나던 곳. 이번에는 연길에 아로새겨진 우리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연길에 도착하니 비가 오지 않는다. 곳곳에 한글 간판이 우리를 반겨 고향에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연변 재중동포의 모임인 연변후대사랑협회 이경호 회장이 호텔까지 마중나왔다. 연변 재중동포와 교류도 이번 방문 목적 중 하나이다. 18일 저녁 교류회에서 회원들과 만나기로 하였다.

연길에서는 새벽에 문을 여는 시장 구경을 하기로 했다. 연변 동포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