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8일 오전 6시 택시를 타고 연길시 인민공원 옆 시장(市場)으로 갔다. 이명학 국학운동시민연합 국장, 류경성 광주국학기공연합회장과 함께였다. 택시요금은 6위안. 내린 곳은 인민공원이다. 시장은 인민공원 건너편에 있다. 인민공원에 몇몇 사람들이 나와 기공 등 운동을 한다. 공원 안에는 무대 시설이 있다. 인민공원 옆에는 호수가 있는데 물이 매우 맑다. 호숫가에서 중년 남자가 바이올린을 홀로 연주한다. 연길에서 평온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시장은 붐볐다. 옛날 농촌 재래시장처럼 활기가 넘쳤다. 옷, 농산물, 고춧가루, 옥수수, 깨, 수산물, 책, 농기구, 전자상품, 생활에 필요한 것은 다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개고기다. 이곳에서는 ‘단고기’라고 하는데 털을 벗겨 여러 마리를 줄을 지어 둔 것을 보니 역겹게 느껴진다. 국내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라 그럴 것이다. 곳곳에서 스피커를 크게 켜놓고 호객을 하여 제법 시장 분위기가 난다.
재중동포들이 많은 곳이라 우리 음식이 대부분이다. 김치, 열무김치, 미역, 멸치, 젓갈. 시장에는 빠질 수 없는 국밥집도 있다. ‘김숙자국밥집’에서 몇 사람이 아침식사를 한다. 천천히 걸어서 돌아보고 다시 되돌아서 장 구경을 하였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용정 대성중학교.

시장에서 돌아와 7시50분 용정(龍井) 대성중학교로 출발했다. 시인 윤동주가 다닌 학교로 지금은 용정중학교라 한다. 이곳으로 윤동주기념관을 찾아간다. 오늘 도문까지 다녀와야 할 터여서 서둘렀다. 용정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우물은 버스에서 설명을 듣고 창 밖으로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대성중학교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사와 기념관을 분리하여 관람객이 많이 찾아오더라도 학생들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왼편으로 유당 건물이 있고 오른쪽으로 윤동주기념관, 그 옆으로 이상설기념관이 있다. 유당 건물은 광주의 최상옥 남화건설 회장이 지원하여 지은 건물이다. 기념관 앞에서는 노점상이 커피, 음료수, 옥수수 막걸리를 판다. 건물 정문은 반원으로 되었고 위 벽에는 돌에 '사립 대성중학교' 이라는 교명 아래 '룡정시청소년애국주의교육기지'라고 한글과 한자로 새겼다. 정문 왼편으로 '용정시관광지점 대성중학 옛터 대성중학구지大成中學舊址'라는 안내판을 용정시 관광국에서 세웠다. 왼편으로 '룡정중학교력사전람관 애국주의 교육기지 중공연변주위 주인민정부 2012년 11월'이라는 제법 큰 간판이 있다. 이곳은 룡정중학력사전람관이다. 뜰에는 윤동주시비가 있다. '서시(序詩)를 한글로 새기고 다시 중국어로 번역하여 새긴 시비다.

▲ 지금은 용정중학교역사전람관이 된 대성중학교 뜰에 세운 윤동주 시비. '서시'가 한글과 중국어로 새겨져 있다.

윤동주시비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니 기념관 2층에서 밖을 내다보던 여자 분이 한국어로 소리친다.
"2층으로 바로 올라오세요."
2층이 기념관이다. 이곳에서 우리를 맞이한 이는 재중동포로 용정중학교 교사라고 소개한다. 전람관 초입에서 머리말(前言)을 읽는다. 전람관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 알 수 있는 글이다.

"20세기 초부터 룡정을 중심으로 설립된 연변지역의 조선족사립학교들은 이주민에게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투사를 육성하는 데 주력함으로서 민족해방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애국애족의 민족교육을 통해 항일민족의식을 키운 항일투사들과 이주민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가담하였고, 중국내 기타 민족들과 함께 광복의 그날까지 지속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광복 전 룡정은 연변지역의 민족문화 교육의 발상지였으며,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책원지였다. 수많은 항일투사들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광복 전 룡정에 건립된 대성, 은진, 동흥, 광명, 명신녀고와 광명녀고 등 6 소중학교는 바로 민족의 수난기에 창립된 력사가 유구하고 항일의 우량한 전통을 갖고 있는 학교들이였다. 력사의 변천과 함께 이 6소중학은 합병되여 길림성립용정중학으로 되였다.
이 전시관을 통하여 연변의 역사를 펼쳐보면 연변조선족은 불굴의 항일투쟁정신과 근로용감하고 슬기로운 우수한 품성을 지닌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전시관은 우리 민족후대에게 향토애, 민족애, 조국애를 키워주는 훌륭한 교육기지로 될 것이다." 
 
안내하는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 자료를 하나하나 살펴본다. 사진 자료 등을 통해 용정의 기원, 연변의 역사, 이주초기 조선족의 생활상, 민족교육운동, 민족교육의 선구자로 서전서숙을 세운 이상설을 소개한다. 용정에서 전개된 항일운동, 연변의 항일운동도 별도로 보여준다.
연변의 민족학교로 서전서숙을 비롯하여 명동학교, 정동학교, 창동학교, 광성학교, 대성중학교, 광명학교, 명신녀학교, 광명녀학교, 성경학원이 있었다. 이런 학교가 운영됐다니, 우리 동포가 이곳에 얼마나 많이 이주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일제에 국권을 잃자 국외에서 항일투쟁하기 위한 망명이 잇따랐다. 연변에는 일찍이 우리 동포가 살기 시작하여 항일투쟁의 발판이 되었다. 용정에서 전개된 항일운동을 소개하는 전시물에는 이렇게 설명한다.
"항일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연변으로 망명한 항일운동가들은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투철한 민족해방투쟁정신을 갖춘 항일애국지사들을 양성하였다. 이를 토대로 1919년 3·13 반일시위운동 이후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의 15만원 탈취 의거, 봉오동·청산리대첩 등은 바로 이와 같은 민족교육을 통해 항일의식을 키워온 조선족 이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대일항쟁기 연변이 독립군 기지로서 인재양성과 민족의식 함양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대성중학교에서 2014 역사속 한중 화해 협력 사례지역답사단이 기념 촬영을 했다.

15만원 탈취 의거도 중요한 투쟁이다. 주인공 사진과 신문기사, 의거지 비석 사진을 전시했다. 15만원 탈취 의거는 철혈광복단 단원인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김준, 박웅세 등이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사상을 선전하는 기관지의 발행과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1920년 용정 동량리 어구에서 일본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한 의거이다.
1920년 1월1일 윤준희, 임국정 등은 조선은행용정출장소 서기원 전홍섭으로부터 머지않아 회령출장소의 자금이 용정출장소로 수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들은 자금을 탈취할 지점을 동량구 어구로 정하고 1월4일 동량리 어구에 매복했다. 오후 6시께 현금 수송대가 선바위를 지나 동량리 어구와 승지촌 사이에 이르렀을 때 일제히 습격하여 거사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무기 구입을 하던 중 변절자 엄인섭의 밀고로 일본 헌병대에 포위되었다. 최봉설만 탈출하고 나머지는 체포되었다. 일제는 윤준희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여, 이들을 살인약탈죄로 사형에 처하고, 전홍섭에게는 징역 15년을 선고하였다.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은 와룡동 출신이다. 박청산이 펴낸 ‘내 고향 연변’(연변인민출판사, 2004)를 보면 “와룡동은 연길 서쪽 소영향 민흥촌 지역으로 마을 서쪽에 구불구불 뻗은 산이 용이 누워 있는 듯 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이 와룡동은 함경북도의 가난한 농민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 1883년에는 80여 세대가 사는 큰 동네가 되었다. 1907년 오상근, 이병휘, 남성우 등이 반일민족영재를 양성하기 위해 창동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910년 중학부를 부설하고 교명을 창동학교로 바꾸었다. 이 중학부에서 십여년 동안 200여명의 학생을 육성하였는데 많은 항일투사가 배출되었다. 창동학교의 많은 교원과 학생 및 졸업생들이 철혈광복단에 참가하여 싸웠다.”고 한다. 
 
봉오동·청산리 대첩을 소개한 자료를 자세히 보았다.
"민족교육운동을 통하여 투철한 항일민족의식을 키워온 연변 조선족 이주민들은 3.13운동이후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6월4일부터 3일간 전개된 봉오동 전투는 연변일대 무장부대가 조선국내 진공작전을 벌이자 이에 일본군이 추격하면서 시작되었다. 홍범도는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협력하여 일본 '월강추격대대'를 봉오동에서 골짜기로 유인하여 수십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일제는 연변일대의 항일무장부대를 소멸하기 위하여 1920년 10월 19사단을 중심으로 1만 5천여명의 일본군 정규부대를 동원하여 연변일대를 대거 침범하였다. 이에 김좌진 장군의 대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10여개의 항일무장단체들은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1920년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화룡현 삼도구와 이도구 일도의 백운평, 어랑촌, 고동하곡 등지에서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청산리대첩을 거두었다."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선 인사들로 홍범도 장군, 안무 장군, 서일장군, 김좌진 장군 세 분의 사진과 약력을 소개한다. 3ㆍ13운동은 1919년 국내에서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연변에서 일으킨 반일운동이다.
안중근의사와 의거를 소개하는 자료도 전시되어 있는데 1907년 안중근 의사가 연변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투쟁을 했기 때문이다.

▲ 용정중학교역사전람관에는 연변지역 항일투쟁을 중심으로 민족교육, 항일무장투쟁을 소개한다.

연변의 항일운동을 알리는 전시판에는 "1920년대 초반부터 연변의 민족학교를 중심으로 맑스-레닌주의가 학생과 민중들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주도 아래 대중적인 반제반봉건투쟁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시각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대성중학교가 어떻게 하여 용정중학교가 되었지 연혁을 정리해 놓아 그 역사를 살폈다.  대성중학교는 대성유교의 공교회에서 1921년 10월 8일 설립하였다. 민족주의자 강훈이 학교운영사 겸 교주였다. 일제의 탄압과 자금난으로 2년 8개월 폐교되었다 1926년 박재하가 복교하였다. 1934년 일제가 강제로 대성 동흥 두 학교를 합병하였다 일년 후 분리하였으며 1939년 6월 15일 다시 합병하여 용정국민고등학교 농과로 바꾸었다.
1945년 9월12일 현기성 선생이 추대되어 대성중학교는 두 번째 개교하였고 1946년 9월16일 대성, 동흥, 은진, 영신, 광명녀고, 영신여자중학ㅡ 6개 용정 내 중학교를 통합하여 옛 대성중학교 자리에 길림성립용정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85년 1월 용정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안내문에는 "유구한 력사를 가진 룡정중학교는 교육의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최신식 교육시설을 갖추었으며, 덕, 치, 체를 겸비한 우수한 교원 150여 명과 2천 여 명에 달하는 재교생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근래에 '전국현대교육기술실험학교' '길림성교육계통선진학교' '연변조선족자치주시범학교' 등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을 소개하는 전시물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저항시인(항일시인) 윤동주’라고 이름하여 그를 소개하는 글이 있고, 대학시절 사진 등 생전 윤동주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또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시집 표지 사진, 묘와 비석 사진 등도 보인다.

생각과는 달리 윤동주 시인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윤동주 시인 개인보다는 용정중학교역사전람관이기 때문이리라. 연변에 이주하여 온갖 고초를 이겨내며 항일독립운동을 한 조선 동포의 역사를 한 곳에 전시하여 후세에 알리는 것으로도 이 전시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시의 끝을 알리는 곳에 제시한 ‘종언’에 그런 기대를 담았다.
“민족의 얼을 키워가고 있는 룡정중학의 발자취는 말 그대로 생통한 역사의 거울이다. 20세기 초의 룡정은 투철한 민족교육을 통하여 조선민족에게 근대문명을 전수하고 민족의식을 키워간 교육의 요람이었고 항일무장투쟁의 주요한 근거지의 하나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달래고 민족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룡정으로 모였던 수많은 항일운동가들과 애국선렬들의 발자취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 불굴의 민족혼의 표상이 되고 있다.
력사는 과거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선렬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은 중국 조선족의 번영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이며 후세들은 그 위업을 이어받아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갈 것이다.
민족의 융합과 평화를 지향하는 오늘, 룡정은 항일 투쟁의 력사적 전통을 중심으로 조선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평화와 화합의 마당으로, 또한 과거 중한간 공통 항일투쟁의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의 우호와 협력을 다짐하고 련결하는 가교가 될 것이다.”

기념관 출구에는 기념관에 성금을 기부한 사람들 사진을 전시하였다. 이곳에서 우리도 기념관과 윤동주 시인 후배들을 위한 성금 겸 장학금을 각자 기부했다.  전람관을 나와 바로 옆으로 이동하여 이상설기념관을 관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