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8일 오후 도문으로 출발했다. 얼마 가지 않아 버스가 멈춘 곳은 선구산성(船口山城) 어귀. 선구산성을 알리는 비석이 두 개 서 있다. 개산둔진(開山屯鎭)에서 북으로 7.5㎞ 가량 가면 선구촌5둔(船口村5屯)이 나오고 이곳에서 다시 서북으로 300m쯤 가면 광개향(光開鄕)에 이르는데 이곳에 선구산성이 있다. 산성으로 올라가지 않고 산 아래에서 임찬경 박사의 설명을 들었다. 발해시기에 축성되어 이후 금나라 때까지 계속 사용된 산성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 도문으로 가는 길에 선구산성 초입에서 선구산성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비석에는 금나라 때 축조됐다고 한다.
"이 산성은 금나라 때(기원 1115~1234년)에 축조된 것이다. 동남성과 서북성으로 이루어졌는데 평면은 룡형에 가까우며 방향은 140도이다. 동남성의 둘레는 1,960미터이며 서쪽모서리 근처에 대형건축지리 한 곳이 있고 동남과 동북모서리에는 거주지자리가 있으며 서남과 서북에는 각 문자리 하나씩 있다. 서북성의 둘레는 1,814미터이다. 이 성은 동남성이 축조된 후에 쌓은 부속성이다. 성 안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괴면기와막새, 처마기와 손가락누름무늬기와 륜제닉질회색토기그릇 밑굽 등이 있다. 성벽 밖으로 10미터 이내를 중점보호구역으로 한다.”

주성 안에서 손가락무늬기와, 납작한 암키와, 귀면막새기와, 깨진 회색질그릇 등 유물이 나왔다.
선구산성 앞 강이 흐르는 곳에는 가슴 아픈 곳이 있다.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았으나 지금은 갈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간도(間島)다. 사이섬, 간도라는 지명이 유래된 섬이 이곳에 있다. “간도 명칭 유래는 종성, 온성 사이의 두만강 지류가 갈라져 그 중간에 자연히 섬(島)이 생겨 중주(中州)를 형성하였는데 땅이 매우 비옥하여 부근 사람들이 ‘사이섬(間島)’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심상용 엮음, ‘간도 비극의 땅 잊혀진 영토’, 도서출판 아우누리, 2013, 14~15쪽)
이곳은 우리 땅이었으나 청나라가 이를 인정하지 않아 분쟁이 발생하였다. 1909년 9월 중국과 일본이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청나라에 넘어가게 되었다. 우리 영토를 청나라와 일본이 마음대로 했다. 대한제국이 힘이 없었으니, 이렇게 한 것이다.
지금 이곳은 들어갈 수 없게 해놓았고 간도, 사이섬임을 알리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간도의 유래가 된 사이섬이 이곳에 있다는 걸 어찌 알랴!

이 선구촌 인근 광소촌(光昭村)에는 두만강나루터가 있다. 이곳이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가 생겨났다는 곳이다. 이 나루터 기슭에는 순경국, 해관을 비롯하여 음식점, 술집, 시장, 여관 등이 들어서고 나루터에는 큰 배가 쌀을 실은 수레와 오가는 장사꾼, 길손을 실어 나를 정도 번성했다고 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도문으로 향했다. 북한으로 가는 철교와 인도교가 있는 도문은 한가했다. 금요일 오후라서 그럴 것이다. 1990년대 왔을 때는 조선동포들이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었는데. ‘중국도문변경’라는 안내판 앞에서 갈 수 없는 북한 땅을 바라보았다. 건너 편 북한 땅은 남양(南陽)이다.

▲ 도문에서 북한과 중국 국경을 알리는 비석 너머로 북한이 보인다.

도문시의 역사는 7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1932년 이전에는 백십 여 호밖에 인가가 없었다. 조선인들은 이곳을 회막동(灰幕洞), 중국인들은 하전자(下甸子)라고 불렀다. 1933년과 1935년 경도선(장춘-도문), 목도선(목단강-도문)이 부설된 후 도문은 점차 도시 규모를 갖추게 되고 동북과 조선을 잇는 중간역이 되었다. 만주국 시기 일제는 도문에다 도문주재 외교부판사처 등 기관을 설치하였다. 그 무렵 이곳은 기생계층이 집단 거주하는 장소로 투기상이 날치는 거점이 되어 여관, 식당 등 업종이 기형적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박청산 저 ‘내 고향 연변’ 연변인민출판사, 2004, 100쪽).
1934년 만주국이 도문시를 설치하여 회막동이 도문이 되었는데 도문(圖們)은 토문(土們)과 같은 뜻이다. 백두산정계비에 나오는 ‘동위토문(東爲土們)’의 그 토문이다. 도문은 토문강이 두만강임을 은근히 주장하는 것이다.

▲ 도문시박물관에 전시된 발해 강역도.

도문통상구 기념품 가게에 들렀더니 북한에서 온 상품이 제법 있었다. 그 중에 북한 돈도 상품으로 판매하였다. 기념품으로 팔리는 화폐. 기념품 구경을 끝내고 도문시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가이드가 처음 가는 곳이라 다소 헤매다가 시내 중심부로 들어가 찾았다. 건물 중간층에 박물관이 있다. 도문시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도문의 역사를 전시하였는데 발해(渤海)를 강조하였다. 발해국시기 도문을 이렇게 소개한다.
"기원 698년 속말말갈의 수령 대조영이 지금의 목단강 상류(돈화시 경내)에 도읍을 앉히고 당조의 책봉을 받았다. 발해국은 당조를 본땀으로 하여 경제가 번영하고 문화가 발전함으로써 당시에 '해동성국'이라 일컬었는데 5경15부62주130여현을 두었다. 도문은 발해중경의 관할 범위에 들어 있었다."

▲ 도문시박물관은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보낸 통로인 '일본도(日本道)'를 지도로 소개하였다.

발해가 당나라의 책봉을 받았다는 점을 밝히고 당나라를 모방했다는 점을 적었다. 발해 이전 고구려를 소개하는 자료는 없다. 또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보낸 경로를 ‘일본도(日本道)’라 하여 지도로 소개하였다. 이것만 보면 발해에는 일본도만 있는 줄 알겠지만 그렇지 않다. 발해에는 대외로 통하는 주요한 통로로 당으로 가는 조공도와 영주도(營州道), 신라로 가는 신라도, 거란으로 가는 거란도가 있었다.  이런 통로는 덮어두고 '일본도'만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문시박물관에는 조선족 이주 약사를 전시하여 눈길을 끌었다. 크게 세 차례 조선족이 이주하였다고 했다. 1차는 생계 목적으로 농민이 이주하였다. 19세기중엽부터 1910년까지는 경제적 원인이 동기로 되어 이주하였다. 1875년 청나라가 동변도 지역에서 조선인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경작하는 것을 실시한 후 조선북부의 빈곤한 사람들이 연이어 이주하였다. 1881년 청나라는 "이주민으로 변경을 채운다"는 정책을 실시한 후 연변을 조선족의 '전문개간지역'으로 확정하였다.
다음으로는 항일 목적의 애국지사 이주 시기이다. 1910년 한일병탄으로부터 1931년 9.18사변(일본의 동북 점령)까지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자가 많이 이주하였다. 이 시기에 이주한 사람들은 농민뿐만 아니라 노동자, 지식인,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었으며 특히 조선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들어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모색하였다.

▲ 도문시박물관에는 조선족이 과거 세 차례 크게 동북으로 이주한 역사를 정리하여 전시했다.

그 후 1931년부터 1945년까지는 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이민이 대부분이었다. 1931년 일본은 중국의 동북을 침략하여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웠다. 그리고 동북지역에 장기간 지배를 도모하기 위하여 조선인이민계획을 수립하여 조선인을 동북각지에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이주사(移住史)를 보여주며 ‘귀화한 조선족 아이들’이라는 설명을 붙인 사진을 함께 전시했다. 중국옷을 입은 아이들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청나라는 200여 년 간 봉금(封禁)을 실시하여 이 지역은 무인지경이었다.
남의 손으로 정리된 동포의 피눈물나는 이주사를 보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싶다. 지금도 우리의 운명 상당부분이 주변 강대국에 의해 결정되는 처지가 아닌가!
 

도문시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은 대부분 조선족 동포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국내의 민속박물관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