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보훈처 후원 2018현충시설활성화사업의 일환으로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두 번째 답사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하는 호국역사탐방’에 나서 4월 2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남산팔각정을 답사했다.

장충단은 을미사변과 임오군란으로 순사한 충신과 열사를 제사지내기 위해 1900년 고종이 건립하였던 현충시설이었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폐사되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다. 상해사변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인 박문사를 건립하였다. 광복 후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지금에 이어져 오고 있다.

고종황제가 세운 장춘단은  최초의 현충시설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고종황제가 세운 장춘단은 최초의 현충시설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이곳의 현충시설로는 장충단공원에 있는 유관순 동상과 이준 열사 동상이 있다. 3.1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유관순 열사는 학생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독립 운동가이다.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3.1운동에 참여하고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그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만세 현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군의 총과 칼에 희생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서도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관순 열사의 동상 앞에서 답사단은 개인과 국가는 운명공동체임을 배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유관순 열사의 동상 앞에서 답사단은 개인과 국가는 운명공동체임을 배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이번 답사 참가자들은 지난주에 방문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유관순 열사에 관해 설명을 상세히 들어, 오늘 동상 앞에서는 더욱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이준 열사는 고종황제가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파견한 세 명의 특사 중 한 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법조인으로 미래가 촉망되는 관리였으나 나라가 일본의 침략 아래 놓이게 되자 일제에 복무하는 관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그 먼 네델란드의 헤이그까지 갔으나 만국평화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순국하셨다. 그의 유해가 헤이그에서 1963년 서울 수유리 애국지사묘역으로 안장되고 1964년 이곳 장충단에 동상이 설립되는 데는 5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장춘단에는 우리나라 최초 검사였던 이준 헤이그특사의 동상이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장춘단에는 우리나라 최초 검사였던 이준 헤이그특사의 동상이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국민과 국가는 운명공동체라 장래가 촉망되는 어린 유관순도, 엘리트 관리였던 이준 열사도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는 그들의 꿈을 펼칠 수가 없었다. 나라가 수난을 겪는 상황 속에서 목숨을 바쳐 우리나라와 민족정신을 지키셨던 선열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장충단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라고 하는 수표교가 놓여있다. 조선 세종 때 청계천에 가설한 돌다리로 원래 현재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수표는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는 것으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과학기술을 알 수 있는 유산이다.

세종대왕 때 물의 높이를 재는 데 이용했던 수표교가 장춘단 공원에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세종대왕 때 물의 높이를 재는 데 이용했던 수표교가 장춘단 공원에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성곽을 따라 올라가니 남산의 정상을 알리는 팔각정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남산서울타워가 보인다. 그 곁에 조선시대의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있다. 5개의 봉수는 평상시에는 1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2개, 국경 가까이 오면 3개, 국경을 넘으면 4개,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봉수에 불을 피웠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꽃으로 연락했다. 지금은 전 세계 어디에서건 휴대폰으로 연락이 되는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껴진다. 급박한 상황에서 먼 곳의 소식을 전한 봉수대를 보니 신기했다.

휴대폰과 인터넷의 시대에 봉수대 앞에 서니,  통신기술이 얼마나 눈부시게 발달했는지 실감되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휴대폰과 인터넷의 시대에 봉수대 앞에 서니, 통신기술이 얼마나 눈부시게 발달했는지 실감되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서울의 상징인 남산의 고유 이름은 목멱산이라 하였다. 조선 태조 때 한양을 지켜주는 산으로 목멱대왕이라고 의인화하고, 국가의 안위를 지키는 국사당인 목멱신사를 지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일제는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겨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지어 참배하게 하였다. 광복이후 신궁을 없애고 그 자리에 지금의 팔각정이 세웠다.

서울 남산에 있는 목멱신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일제가 세웠던  조선신궁을 헐고, 세운 것이 지금의 팔각정이다. 나라를 빼앗기니 산 중에도 화가 미쳐 문화재를 지킬 수 없었던 역사를 배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서울 남산에 있는 목멱신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일제가 세웠던 조선신궁을 헐고, 세운 것이 지금의 팔각정이다. 나라를 빼앗기니 산 중에도 화가 미쳐 문화재를 지킬 수 없었던 역사를 배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나라를 잃으면 국민의 목숨도 잃고, 우리의 문화재도 그 모습을 잃게 된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런 중에도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정신을 지키고 있으면 다시 되찾을 수 있다. 다시는 나라를 빼앗겨 가슴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그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좋은 나라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