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제87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이 10일 오전 서울 효창공원 내 이봉창 의사 묘전에서 거행되었다.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정수용) 주관으로 열린 추모식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처장, 장호권 광복회 서울시지부장,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장 등 보훈관련 인사와 일반시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사, 추모사에 이어 헌화, 분향이 진행되었다.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 10일, 서울 효창공원 내 이봉창 의사 묘전에서 제87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을 거행했다. [사진=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 10일, 서울 효창공원 내 이봉창 의사 묘전에서 제87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을 거행했다. [사진=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1901년 8월 서울 용산에서 태어난 이봉창 의사는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았다. 이후 만주로 옮겨 남만(南滿) 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의사는 이 과정에서 자신을 비롯한 부모와 이웃들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후 1924년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듬해 형 이범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으로 도쿄와 오사카 등지를 전전했다.

1931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 백범 김구 선생의 지시를 받고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932년 1월 8일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바치고 환궁하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동경 경시청 정문 연병장에서 폭탄을 투척했다. 거사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봉창 의사의 장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져 타격을 가하려 했던 일은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현장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된 의사는 그 해 9월, 도쿄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10월 10일 동경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