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섭 의사, 1924년 일본 황궁에 첫 폭탄을 던지다
김지섭 의사, 1924년 일본 황궁에 첫 폭탄을 던지다
  • 한승용 전문기자
  • k-spirit@naver.com
  • 승인 2018.02.2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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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이야기 2

 1924년 1월 5일 일왕(日王)이 사는 도쿄 궁성에 조선의 한 사나이가 폭탄을 던져 전 일본이 경악하였다. 조선 침략통치의 원흉인 일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은 의거였다. 일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은 첫번째 의거로 독립투쟁사에 큰 획을 그은 이는 추강(秋岡)김지섭(金祉燮) 의사이다.  1928년 2월 20일은 김지섭 의사의 서거일이다.

▲ 김지섭 의사 이력서 <사진=독립기념관>


김지섭 의사는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 풍산읍 오미마을 풍산김씨 집성촌에서 김병규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미마을은 김지섭 의사를 포함하여 2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고 한다). 김지섭 의사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곧은 성격에 한달만에일본어를배웠다고 전할 만큼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였다고 한다. 

21세에 상주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금산지방법원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여 금산군수 홍범식 선생이 자결하자 그 시신을 수습한 뒤 자신도 공직을 분연히 사직하고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탄압이 거세지자 1920년 5월 만주로 망명한 김지섭 의사는 동지 김원봉·곽재기·김시현 등과 조국 독립 방략을 도모하였다. 
1922년 여름 상해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그는 상해,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의열단은 대규모로 국내로 의열단원을 보내 조선총독부, 경찰서 등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일본 고위관료, 친일파 등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다. 

 

 김지섭 의사는 1922년 4월 고려공산당원(高麗共産黨員)이며 의열단원인 장건상과 상의하여, 러시아로부터 자금을 받아 이것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충당하고자 동년 11월모스크바에서개최된 극동민족대회(極東民族大會)에 다수의 동지와 참가하였다. 

 

 그후 김지섭 의사는 국민대표대회(國民代表大會)에도 참석하였으며 국내에서 적 기관의 파괴공작을 실행코자 1923년 2월 폭탄 36개(대형 6개, 소형 30개)를 상해로부터 천진(天津)으로수송하여 안동현(安東縣:지금의 단동)에 중계소를 설치하고 김시현·유석현·황옥 등으로 하여금 서울로 반입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3월 15일을 기하여 총독부·경찰서·재판소·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려다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김시현 등 3명이 피체되어 실패하고 김원봉·장건상 등과 상해로 피신하였다. 
 

이 사건은 총독부 밀정 정책의 일환으로 경기도 경찰부장 시라카미유우키치(白上佑吉)가 한인경부(韓人警部) 황옥을 상해로 밀파하여 극동민족대회(極東民族大會)의회의 내용을 탐지하고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밀탐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일망타진하자 하였던 가공할 음모였다. (영화 ‘밀정’ 의 주제가 된 상황).

황옥은 독립운동가로 가장하고 김시현 등과 동지가 되어 온갖 편의를 제공하였다. 안동현(安東縣)에서 서울로 폭탄을 수송할 때에는 황옥이 국경시찰이란 명목으로 공용출장의 허가를 받아 폭탄을 포장한 궤짝에 '총독부경부공용하물(總督府警部公用荷物)이란 표찰을 달아 무사히운반하게 된 것이다. 일경은 황옥의 정보제공으로 계획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일거에 전원을 체포·투옥하였다.  이 사실은 같은 사건으로 피체되어 법정에선 유석현·이현준·황옥의 법정진술로 드러났다.  


거사에 실패한 김지섭 의사는 1923년 12월 당시 조선총독부 판사직에 있던 백윤화에게 군자금 5만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백윤화의 배신으로 동지 윤병구(尹炳球)가 피검되어 실패하였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일제는 한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고 무고한 우리 동포 6,600여 명(2만 명이 넘는다는 보고도 있음) 학살하여 일본내의 폭동을 사전에 봉쇄하는 만행을 일으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민족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더욱이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쳐오던 의열사의 가슴은 불타올랐다. 
1924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총리를 비롯한 대신과 조선총독이 참석하는 제국의회(帝國議會)가 열린다는 신문보도를 본 김지섭 의사는 인종 학살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단죄하고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폭탄 투척 거사를 계획한다. 


가장 일본인처럼 생겼고 일본어를 잘 한다는이유로 김지섭 의사가 나섰다.  의열단 특파원으로 여비 100원을 받아 일본의 공산주의자 히데지마(秀島廣二)와  미쓰이물산의 석탄운반선 텐조야마마루(天城山丸)의 선원 고바야시(小林寬) 형제의 협조를 받아 폭탄 3개를 휴대하고 나카무라히코타로(中村彦太郞)는 가명의 명함을 휴대하고 동년 12월 20일 밤 상해에서 일본행 석탄운반선에 몸을 실었다.

▲ 김지섭 의사의 옥중편지. <사진=독립기념관>

이때 그는 나라와 겨레를 위한 애국충정의 웅지를 다음의 싯귀로 표현하였다. 


이 한 몸 표연히 만 리 길 떠날 때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벗할이 뉘 있는가
萬里飄然一粟舟中皆敵有誰親 
기구한 나라 물정 촉나라보다험하고 
분통한 겨레 마음 진나라보다 심하다. 
崎嶇世路難於蜀忿憤輿情甚矣秦

 

오늘 몸 감추고 바다 건너는 나그네 

그 몇해를 참으며 와신상담 했던가
今日潛踪浮海客 昔年嘗膽臥薪人 .

평생 뜻한 바 이미 갈 길 정하였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길 다시 묻지 않으리. 
此行己決平生志不向關門更問津 

김지섭 의사는 상해에서 평양을 거쳐 규슈로 도착하는 석탄운반선 배바닥의 쌀궤에 숨어 밀항했다. 엄동설한 바다, 바닥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하루 한 번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햇빛 한 번 보지 못 한 채 11일, 260여 시간이 걸려 12월 30일 운반선이 후쿠오카현 야하타제철소안 벽에닿았다. 밤을 틈타 상륙하여 그곳 여관에서 3일간 투숙하였다. 


긴 여정에 체력뿐만 아니라 도쿄로 갈 여비도 바닥나 궁여지책으로 시계와 모포, 외투 등 가진물품을 팔아 겨우 여비를 마련하였다. 폭탄 3개밖에 남지 않은 김지섭 의사의 가슴은 독립에의 의지로 더욱 불타 올라 도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1924년 1월 3일 오사카역에 도착하여 제국의회가 중단됐고 언제 열릴지 모른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무작정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 김지섭 의사는 일본이 신성시하며 천황폐하라 불렀던 조선 침략의 수괴이자 원흉인 일왕 히로히토를 목표로 투탄하기로 결정한다.


1월 5일 도쿄에 도착한 김지섭 의사는 지도를 구입, 황성(皇城)의 니주바시(二重橋)  사꾸라다몬(櫻田門) 부근을 왕래하며 지형을 정찰하고 오후 7시 20분 거사를 결행코자 정문에 접근하여 폭탄 한 개를 던지고 재빨리 궁성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때 위병 둘이 달려들므로 나머지 폭탄 두 개를 니주바시(二重橋) 한 복판에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김지섭 의사는 일경에  피체되어 히비야경찰서(日比谷警察署)에 구금되고 말았다. 

 

재판 중에 김지섭 의사가 한 진술에 따르면 폭탄을 본인의 생명과 같이 여겼고 출발 전에 테스트도 모두 완벽하게 마쳤으나 10여 일에  걸친 항해 중 바다 습기에 의해 도화선이 눅눅해져서 불발한 것으로 보았다.  


김지섭 의사의 거사에 당황한 사법성(司法省)에서는 검사총장스즈끼(鈴木)·검사정(檢事正)·예심판사(豫審判事)와  검사 등을 보내 엄중한 취조를 하였다. 당시 신내각을 조직하던 교우라(淸浦)는 내각 조직을 중지하였고 근신하던 야마모토(山本)내각은 긴급 각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였다. 각 신문사의 취재 차량과 경찰·헌병들의 계엄 차량이 도쿄 전 시가를 누비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일제는 내무차관 쯔카모토 세이지(塚本淸治)를 견책에 처하고 경시총감 유아사구라헤이(湯淺倉平), 경무부장 쇼우리키마쯔타로우(正力松太郞), 아이고경찰서(愛宕警察署) 타큐만지(田久萬治) 등을 파면하였다. 일본은 이 의거를 조선의 모든 신문에서 다루지 못하게 하여 4월 중순이 지나서야 기사화되었다.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
 

김지섭 의사는 "나는 결심과 각오가 있어서 한 일이니 지금와서도 아무 할 말이 없다. 변호사의 변호도 받지 않을 예정이다"하였으나 중벌범에게 반드시 변호인이 있어야 한다고 후세다쓰지 변호사가 설득하였다.(후세다 쓰지 변호사에 관한 설명은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첨부한다)

 

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되어 8개월간이나 예심을 받고 1924년 9월 9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공판이 개정되었으나 신병으로 연기를 거듭 하였다. 건강하던 몸이 옥중고를 겪으며 약해져 이삼십 분동안을 바로 앉거나 서지 못 하였다고 한다. 조선학우회 등이 음식을 차입하여주어도 자기 뜻을 이루려다 성공하지 못한 것을 통분히 여기는 김지섭 의사는 도리어 이런 음식을 먹는 것은 양심상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김지섭 의사의 재판정은 방청객이 만원이었다고 한다. 10월 11일에 열린 첫 공판에서 김지섭 의사는 7~8매가 되는 장문의 진술서로 일제의 침략정책을 통박한 다음, 이어서 "이번에 내가취한 행동은 침략 정치에 도취되고 있는  왜국倭國관민을 각성시키고 그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당당한 어조로 소신을 밝혔다. 

 

이어 총독 정치의 악랄성과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착취와 동포 의 빈곤한 생활을 들어 일제의 학정(虐政)을 통박한 다음 "한국사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라고 1시간 20여 분간 민족혼에 불타는 일본악정통론(日本惡政痛論)의 열변을 토하였다. 그리고 변론의 끝으로 김지섭 의사는 무죄 석방이 아니면 사형을 주장하였다. 


그의 변호사 후세다쓰지는 "조선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 무죄를 주장했으나,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지섭 의사는 사형 구형에 "법률의 정신은 내 정신과 일치한다. 즉 법률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목적함에 따라 나는우리 조선민중의 생명 재산을 위하여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한 것으로 법률상 하등의 벌이 있을 까닭이 없다.  결국 우리 조선 민중은 굶어죽고 맞아죽고 하는 가운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받는다 하는 것은 진실로 넘치는 광영이다." 고 말했다. 

 

고향 가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1925년 1월 6일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여 공소원에서 심리중에 있었다. 김지섭 의사의 구류 기한이 1월5일까지여서 공소원에서 형무소에 재구류수속을 의뢰하였으나
형무소에서 수속을 하지 않아 출옥시키는 것이 마땅한 상황이었으나 출옥시키지 않고 불법감금을 하였다. 김지섭 의사는일본의 불법한 처사에 분개하여 유서를 써놓고 5일부터 단식투쟁을 벌여 검찰과 공소원, 형무소에 일대파란이 일어났다. 


단식 투쟁 중인 김지섭 의사를 방문한 동아일보 기자는 "얼굴빛이 몹시 푸르고 매우 초췌하여 인사불성에 빠진 그는 다만 "죽음"으로써 몸을 결단코자 하는 나를 위하여 그와 같이 근심 하는 것은 대단히 미안합니다 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고 전했다. 


일본 사법당국자와 형무소장은 그 실책에서 비롯된 김지섭 의사의 단식 투쟁에 몹시 당혹해하면서 대책을 강구하였다. 조선학우회 등을 통해 김지섭 의사가 밥을 먹도록 권고시켰으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연일 계속된 단식에 의식 없이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 빠지자 의사를 불러진찰 받게 하였다. 의사가 감옥을 떠나지 않고 늘 주의하며 의식이 없을 때마다 영양물을주사하여 아사하지 못 하게 하였다. 김지섭 의사는 변호사와 동포들의 만류와 함께 단식을 해도 아사할 수 없음을 알고 10여일만에 단식 투쟁을 중단하였다.  

일본 법정은 재판장의 심문과 김지섭 의사의 응답이 일본공안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 하여 공판의 공개를 금지하였다. 재판장이 김지섭 의사에게 불공평하고 불온한 처사로 대하여 변호인들이 분개하여 퇴청하는 동시에 기피 신청을 하여 재판에 불응하는 등 단식투쟁 이후에도 김지섭 의사의 항일 법정투쟁은 계속 되었다.

 1925년 8월 12일 동경공소원의 공소심에서 야마자키(山崎)·마쓰타니(松谷)·후지쿠라( 藤倉) 등세 변호사는 비록 일본인이었으나 총독정치의 잔학성과 밀정정책(황옥黃鈺사건을 말함)을 지적하여 그 비열한 행위를 논박한 다음 끝끝내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재판장은 이 변론을묵살하고 원심대로 무기징역을 언도하였다. 

 

 이때 변호사 야마자키(山崎)가 자의로 상고하였으나 이 사실을 안 김지섭 의사는 취하하고 말았다. 이찌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옥고를 치르다, 치바형무소(千葉刑務所)로 이감되었다. 고국의 경성형무소에 가서 복역하고 싶다고 하였으나 당국자가 허가하지 않음을 분개하여 치바형무소 안에서 불온한 행동을 함으로 북해도형무소로 이감한다고 1925년 9월 17일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1927년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1928년 2월 20일 44세의 나이에 뇌일혈로 치바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뇌일혈의 상처와 모양이 이상하여 김지섭 의사의 죽음에 의문점을 남겼다. 변호사는부검을 요청하였고 ‘간도’라는일본인 의사가 해부하고 "머리만 해부하였는데뇌일혈(뇌출혈)은 분명하며 기관지출혈의 장소와 모양이 통례와는다를 뿐아니라 그렇게 된 원인은 연구해본 뒤가 아니면 말할 수 없다"고 전했다.
 

부검 후 화장한 김지섭 의사의 유해는 여러 한일 단체의 추모행사를 마지막으로 고국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총독부는김지섭 의사의 부고 소식을 실은 신문기사를 모두 차압하여 부고소식조차 알리지 못 하게 했다. 

김지섭 의사의 의거는 8년 후 이봉창 의사(1900~1932)의 의거로 이어졌다. 이봉창 의사는1932년 1월 8일,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히로히토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터지긴 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수류탄 폭발로 마차가 부서지고 일본 고관대작 두 명이 부상하였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하는 등 충격을 주었다. 식민지 조선 청년이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사건은 이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정부는 1962년에건국훈장대통령장을 김지섭 의사에게 추서하였고 고향인 경북 안동에는 김지섭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김지섭 의사를 변호한  후세다쓰지는변호사는 일본인 최초로 2004년에 대한민국건국훈장받았다. 일본의 조선침략 부당성을 알리고 독립운동가 구호활동을 한 공로가 인정되었다. 그는 1919년에는 2.8 독립선언의 주체였던 최팔용, 송계백 등을 변호하여 내란죄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의 변호 행적 중 가장 유명한 예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변호이다. 두 사람은 일왕을 폭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검거되어서 일왕 폭살을 기획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이 재판은 박열대역사건으로 불리며 일본 전역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후세다 쓰지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하였을 뿐만아니라 옥중 결혼 수속을 대신해 주었다. 

 

 또한, 후미코가 의문사하자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매장을 해줄 정도로 노력하였다.

 

1923년에 발생했던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해 해당 사건이 일본정부와 일본 경찰,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조선일보에 이를 사죄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1923년에 밀정의 실존 인물인 김시현과 황옥을 변호하였고, 1924년에는 김지섭 의사의 변호를 맡았다.

▲ 한승용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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