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대 ‘패수(浿水)’는 어디일까? 고구려의 평양은 현재 북한의 평양 일대에 있었을까?

이 문제를 연구한 임찬경 박사(국학연구소 연구원)는 《국학연구》 제21집에 게재한 “《수경주(水經注)》를 통한 고구려 평양의 위치 검토”라는 논문에서 북위의 역도원(酈道元)이 패수로 비정하려는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이 절대 없었다고 주장했다.

패수는 조선의 역사 해석과 관련하여 중요한 지명인데, 관련 문헌의 기록이 적다. 임 박사는 “패수(浿水)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처음 기록된 물길의 명칭이다. 서기전202년 한(漢)이 건국된 이후 연(燕) 지역과 조선의 경계로 정해진 것이 패수였다.

《사기》 이후에 서한(西漢) 말기의 상흠(桑欽)이 그의 《수경(水經)》에 단지 18자로서 그 물길이 어느 지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흐르다 바다로 들어간다고만 기록했다. 그리고 북위의 역도원은 《수경》의 패수가 바로 현재 한반도의 대동강이라고 《수경주》권14 <패수>에 간략하게 서술해 놓았다.”고 말했다.

임 박사는 “이 《수경주》 권14 <패수> 기록이 사대사관이나 식민사관을 지닌 학자들이 위만조선을 현재의 대동강에 위치시키는 역사왜곡의 자료로 흔히 사용되었다.”고 지적했다.

《수경주》의 원문 전체에는 평양이란 지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임 박사는 이를 “역도원 당시의 지명인 평양으로 비정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하며 “만약 역도원이 비정하려던 패수가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일대에 있었다면, 《수경주》에 평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대의 지명을 현재의 지명으로 비정(比定)해 주어야, 고대를 현재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지리서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이를 종합하면 역도원이 《수경주》를 쓸 당시에, 역도원이 패수로 비정하려는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이 절대 없었다. 그 때문에 역도원의 《수경주》 <패수>에 평양이란 지명이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임 박사는 “조선시대에 《수경주》는 문인들에 의해 여러 경우의 서술에 두루 활용되었다. 고대의 조선이나 낙랑과 관련한 서술에는 《수경주》의 인용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 비록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패수가 한반도 서부 지역 어느 하나의 물길이라는 인식이 공유되어졌다. 역도원 《수경주》의 패수가 조선시대에 한반도 안의 어느 물길로 정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위만조선을 대동강 아래에 위치시키는 유사 이래 최대의 한국사 왜곡이 완성된 것이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그 왜곡을 명확히 분석했다.

임 박사는 "역도원이 《수경주》에서 조작한 패수는 안정복과 정약용 등에 의해 역사가 되었고, 때문에 우리 역사학계에는 아직도 《수경주》의 패수를 갖고 논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수경주》의 조작이 아직 살아있다는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은 실로 부끄러운 것이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역도원이 《수경주》를 쓸 당시에 고구려의 평양은 대동강 일대가 아닌 그 어디에 있었는가?

임 박사는 논문에서 《수경주》의 원문 중의 “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이란 부분의 해석을 통해, 역도원 시기의 고구려 도읍인 평양이 어느 지역에 있을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검토했다.

임 박사는 고구려 지배계급이 남긴 유적인 고분군이 집중된 지역을 도성의 지표로 볼 수 있는데, 한국 역사학계에서 고구려 고분군이 집중된 지역으로 분류된 현재의 평양과 집안은 역도원 시기의 평양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범위를 더 넓혀보면 주목되는 지점이 바로 요녕성 요양(遼陽)을 들었다.

임 박사는 요양 지역에서는 평양이나 집안의 고분군과 유사한 형태의 고분들이 다수 출토되었고, 지금도 계속 출토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1919년 요양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인 영수사벽화묘를 직접 현지를 고찰한 일본학자 3명이 모두 고구려시대의 것으로 보는 논문을 남겼다. 임 박사는 또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의 위치를 고증해보면 요양 지역은 고구려가 성립되는 시기부터 줄곧 고구려의 영역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요양이 역도원 당시 고구려 도성 즉 평양일 수 있는 가능성은, 북위가 고구려에 전달한 작위(爵位)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임 박사는 설명했다. 492년 고구려 문자왕이 즉위하자 북위으 효문제는 사신을 보내 문자왕에게 ‘문자왕에게 사지절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 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이란 작위를 전해온다. 그 이전의 장수왕 시기에도 북위의 세조는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이란 작위를 보냈다.

북위의 세조가 고구려의 장수왕과 문자왕에게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라는 직함을 부여한 것은, 바로 고구려가 현실적으로이 요해 지역들을 군사와 정치 및 문화와 경제적으로 온전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서》와 《주서》의 요해 관련 기록을 종합하면, 요해란 현재의 시라무렌하 상류 동쪽으로 요하와 그 남쪽의 대릉하 및 발해를 낀 해안과 요동반도 일대 및 그 이동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임 박사는 “또한 고구려의 정치적 중심인 평양성이 그 요해란 지역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란 직함의 부여가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당시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한때 한(漢)의 낙랑군 소재지였던 현재의 북한 평양 일대에 있었다면, 고구려가 그 평양을 중심으로 하고 그 북쪽으로 압록강 일대까지 차지한 그런 국가였다면, 북위가 그런 고구려에게 부여할 수 있는 정치적 직함은 낙랑왕(樂浪王) 혹은 낙랑군공(樂浪郡公) 정도가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

임 박사는 이러한 점에서 “장수왕이 427년에 천도한 평양을 현재의 요양 일대로 보게 되고 역도원 당시의 고구려 도읍 또한 현재의 요양인 것이다. 《수경주》에서 현재의 대동강을 패수로 비정하려던 역도원이 평양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역도원 시기에 고구려 도읍은 대동강 일대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도읍은 현재의 요양에 있었다고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이에 앞서 요양을 역도원 시기의 평양으로 보려면 “요양은 고대의 양평(襄平)”이라는 허구를 먼저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