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라와 인류를 위한 선택을 해온 안중근과 이시영
나와 나라와 인류를 위한 선택을 해온 안중근과 이시영
  • 송시내 (사)우리역사바로알기 교육국장
  • k-spirit@naver.com
  • 승인 2018.05.3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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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송시내 우리역사바로알기 교육국장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서울지방보훈처 후원 2018현충시설활성화사업으로 5월 19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백범광장을 방문하여 현장학습을 했다. 

대한제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에 있을 때 아시아 침략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동양평화론을 주장한 안중근 의사.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안태훈 진사의 영향으로 한학을 배웠으며 명필이었다. 또한 무예에 소질이 있었고 포수들에게서 총쏘기를 배워 명사수였다. 이런 배경으로 의사는 하얼빈에서 정확하게 이토를 사살할 수 있었고, 또한 많은 유묵을 남겼던 것이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현장학습 참가자들이 19일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현장학습 참가자들이 19일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안중근의사기념관 야외에는 안 의사의 힘찬 글씨가 돌에 새겨져있다. 이 글씨는 명필이기도 하지만 내용 또한 의미가 깊다. 하얼빈 의거 후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쓰며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안 의사에게 일본인 간수들과 재판관들은 감동을 받게 된다. 여순 감옥에서 안 의사의 경호를 맡았던 일본헌병 지바 도시치 간수가 안 의사에게 글을 써줄 것을 부탁하자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목숨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을 써주었다. 그 글을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1980년 안중근의사 숭모회에 기증하여 현재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국가를 초월해서 존경을 받은 안중근의사는 한중일이 평화를 이루어 협력하자는 동양평화론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현재의 유럽연합과 같은 협력을 제안한 것으로 100년을 앞선 선진적인 생각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맹세하였지만 힘든 과정 속에서 분열하고 포기하는 동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회를 결성하여 손가락을 잘라 그 뜻이 변치말 것을 다짐했다. 안중근기념관이 12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것은 이 단지동맹회 12인을 상징한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19일 실시한 현장학습 참가자들이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단지동맹회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19일 실시한 현장학습 참가자들이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단지동맹회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사형선고를 앞둔 아들에게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며 아들의 수의를 지으신 어머니 조마리아. 자식의 수의를 만든 그 어미의 심정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역사 속 위인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다. 조마리아는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장남 안중근이 있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실로 조마리아는 자식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묵념을 하는 어린이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묵념을 하는 어린이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백범광장에는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다. 이시영 선생은 한국 최고의 명문가 이회영 일가 7형제 중 다섯째로 평생을 독립운동과 우리나라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22세의 젊은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일찍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나라를 잃자 모든 것을 버리고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때의 나이가 40대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참여하여 마지막 1945년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지킨 인물이다. 광복이후 민족종교인 대종교활동에 진력하였고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성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에 책임을 통감한다는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 정부를 떠났다. 평생을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84세에 사망하였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19일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백범광장에서 학부모와 함께하는 호국 역사탐방 현장학습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19일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백범광장에서 학부모와 함께하는 호국 역사탐방 현장학습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30대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안중근 의사와 평생을 고된 독립운동에 바친 80대의 이시영선생의 삶에서 가치로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삶은 얼마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두 분의 삶은 우리에게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과 인류의 평화를 위한 선택을 해온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들의 삶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들에게 살아서 다가옴을 느끼게 되는 귀한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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