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죽지 않는 의로운 삶과 죽음을 택하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의로운 삶과 죽음을 택하다
  • 정애숙 (사)우리역사바로알기 강사
  • k-spirit@naver.com
  • 승인 2019.06.04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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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역사바로알기, 청소년과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 '장충단 현충시설'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서울지방보훈청이 후원하는 현충시설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을 매주 실시한다. 그 세 번째 탐방지는 장충단 호국의 길에 있는 현충시설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1일 학생과 학부모 120여명이 탐방에 참가해 장충단의 역사를 직접 찾아갔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1일 시행한 청소년과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장충단의 변천과정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1일 시행한 청소년과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들이 장충단의 변천과정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장충단은 충(忠)을 장려하는 제단이라는 뜻으로 고종황제가 1900년에 세운 우리 민족 최초의 현충시설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에게 항거하다가 전사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장병들을 위한 사당을 건립하였고 이후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사망한 문신들도 포함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사당과 부속건물들이 있었으나 일제 때 훼손되고 6.25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장충단 비만 남아있다.

비의 앞면은 건립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쓴 ‘장충단’이라는 글씨가 있고, 뒷면은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충정공 민영환의 글로 143자로 된 장충단의 내력과 의미가 새겨져 있다. 이곳 장충단에서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올렸는데,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 세력이 강해지면서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에 올리는 제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을 이곳 장충단에서 하면서 장충단은 철저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이후 이곳에서는 일본헌병대의 기마사격연습, 실탄사격연습, 일본관리 야유회 등이 열렸다.

우리역사바로알기가 1일 시행한 청소년과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부모들이 장충단에 있는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우리역사바로알기가 1일 시행한 청소년과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부모들이 장충단에 있는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1919년에는 벚나무를 심어 일본식 공원을 조성하면서 현충시설을 위락시설로 바꾸어버렸다. 1931년에는 장충단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를 건립하였다. 이때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파괴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옮겨와 정문으로 이용하였고, 경복궁의 선원전과 원구단의 석고전을 옮겨와 부속 건물로 사용하였다. 이곳을 답사하며 학생과 학부모들은 나라를 잃으면 우리의 자존심뿐 아니라 문화재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을 새겼다.

광복 후 박문사를 철거하였고, 6.25전쟁으로 부속건물들이 파괴되었다. 1959년에 경제개발을 추진하며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던 수표와 수표교가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후 1950~70년대에 유명한 정치유세가 이곳 장충단 공원의 넓은 공간에서 이루어져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장충단에는 장충단비뿐 아니라 현충시설이 여럿 있다.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일성이준열사동상, 유관순열사동상, 3.1운동 기념탑 등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는 1919년 유림대표 137명이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인사가 참여하고 유림대표는 포함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긴 유림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의 33명에 비하면 137명이라는 숫자는 네 배나 많다. 서명자를 모으고 파리장서의 문안을 확정하며 직접 프랑스 파리로 갈 것을 결심한 사람은 심산 김창숙 선생이다. 그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해방이후 민주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로 1925년 유림 중심의 군자금 모금운동인 ‘제2차 유림단 의거’를 주도하기도 했다. 상해에 도착한 김창숙 선생은 먼저 파리에 가서 머물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리인 김규식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이는 외국공관,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전달되었다. 일제는 파리장서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하여 가혹하게 고문하여, 끝내 10여명이 사망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오히려 유림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운동의 초기에는 왕조복고 등을 지향하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3.1운동의 큰 흐름을 보고 이후 더욱 가열차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유림의 첫발이 바로 이 파리장서사건으로 시작된 것이다.

우리역사바로알기가 1일 시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 학부모들이 일성이준열사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우리역사바로알기가 1일 시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에 참가한 학생, 학부모들이 일성이준열사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파리장서비 가까이에는 일성이준열사동상이 서있다. 이준열사는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로 건너가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고자 힘썼다. 이준열사의 동상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건물 앞에도 있는데, 그가 189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최초의 검사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준열사는 황무지개척권 요구철폐에 앞장섰으며 뛰어난 연설과 웅변으로 큰 활약을 했다. 을사늑약 폐기 상소운동, 청년계몽운동, 신민회 조직 등의 구국운동에 앞장서다가 고종의 명을 받고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된 것이다. 

네덜란드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거절되자 각국 언론에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의지를 알리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준 열사는 통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여 이역만리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선생의 유해는 순국 55년만인 1963년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수유리 애국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1964년 이곳 장충단 공원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이준열사는 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그가 법관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지만 독립운동의 험한 길을 택한 이유를 밝힌 것이 있다. "사람이 산다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삶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현세에서의 짧은 생만을 위한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안락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민족과 인류를 위한 삶을 선택하여 불꽃같은 삶을 살아내신 진정한 깨달음을 실천하셨다. 장충단 현충시설을 둘러보며 그분들의 삶을 귀감으로 삼아 오늘 아는 만큼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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