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답사가 막바지에 이르러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인 밀산에 이르렀다. 밀산은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의 보복으로 간도참변이 일어나고 독립군들이 재기를 다짐하며 집결한 지역으로 의미 있다. 이곳 밀산은 한인촌이 형성되어 독립군들이 이곳에서 재기를 모색할 수 있었다. 또한, 러시아 국경과도 닿아 무기를 구하거나 위기의 순간에 러시아로 넘어가기 용이한 지역이었다.

서일총재항일투쟁유적지. 항일독립운동기지로 2015년 중국 밀산시정부가 재중동포 3명의 헌금으로 비를 세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서일총재항일투쟁유적지. 항일독립운동기지로 2015년 중국 밀산시정부가 재중동포 3명의 헌금으로 비를 세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먼저 서일총재항일투쟁유적지에 있는 비석을 찾아갔다. 버스로 멀지 않은 곳 도로변에 큼지막한 비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비석 뒷면에는 서일을 중광단, 대한정의단,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의 지도자이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내용을 새겼다. 이 기념비는 밀산시인민정부가 2015년에 세웠는데, 비의 아래에는 조선족 기부자 세 분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이곳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상이 느껴져 뿌듯하기도 했다. 다만 비 주변을 정비하고 기념관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였다.

중국 답사를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조선족을 바라보는 좋지 않은 시각이 바뀌었다. 조선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며 특히 항일투쟁을 했던 분들의 후손이 많다. 거칠고 낯선 곳에서 땅을 개척하여 우리 민족의 터전을 넓힌 강인한 사람들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역에 있는 중국 세관. 러시아에서 온 관광버스에는 커다란 트레일러를 달았다. 러시아인들은 자국내 부족한 생활물품들을 사러 중국에 오는 것이라고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역에 있는 중국 세관. 러시아에서 온 관광버스에는 커다란 트레일러를 달았다. 러시아인들은 자국내 부족한 생활물품들을 사러 중국에 오는 것이라고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대로 세관이 있다. 마침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광버스 안에는 몸집이 크고 피부가 하얀 러시아인들이 타고 있었다. 버스 뒤에는 커다란 트레일러를 연결하였다. 이들은 러시아에 부족한 생활물품들을 사러 중국에 오는 것이라고 했다. 강대국으로 알려진 러시아지만, 중국의 경제성장에 비해 발전이 더뎌 어려운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독립군 재조직을 이곳 밀산에서 한 이유 중 하나가 일제의 추격이 심해질 경우 여차하면 러시아 땅으로 넘어갈 수 있는 국경지대라는 지리상 특성을 이용한 것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나라를 잃고 중국 땅, 러시아 땅을 오가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절박한 상황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 국민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이곳 국경에 서 있다. 그분들의 희생과 우리 민족의 저력이 느껴져 감사의 마음이 일었다.

서일 총재가 순국한 동산. 중국 밀산에서 서일 총재가 살았던 옛집은 옥수수밭으로 변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서일 총재가 순국한 동산. 중국 밀산에서 서일 총재가 살았던 옛집은 옥수수밭으로 변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서일 총재의 집이 있었던 마을은 지금은 옥수수밭으로 변했다. 옥수수밭 사이에 조그마한 동산이 있는데 그곳이 서일 총재가 자결한 곳이다.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는 만주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항일무장투쟁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피해였다. 그 끔찍한 조선인의 피해를 가슴에 안고 재기를 노리며 이곳 밀산 당벽진에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다시 마적이 습격하여 이곳 마을이 불타고 동지들이 죽어갔다. 서일은 간도참변, 자유시 참변, 마적의 습격 등을 연이어 겪으면서 지도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순교의 심정으로 자결하였다. 서일의 죽음은 일본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인 사건이었으며 그만큼 무장독립운동사에서 큰 손실이었다. 큰 키의 옥수수가 꽉 차있고 나무가 빼곡하여 동산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동산이 보이는 길가에서 술을 올리고 묵념을 했다. 마지막 눈을 감을 때 그 비통함이 어떠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의 저항정신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더는 나라 잃은 떠돌이가 아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그 앞에 서있다. 하늘에서도 그의 투쟁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며 우리를 굽어볼 것이다.

한흥동.  한흥동은 한국이 흥하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승희와 이상설이 1909년에 만든 한인촌이다. 110만평에 달하는 황무지를 매입하고 개간하여 나온 소출로 민족교육을 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한흥동. 한흥동은 한국이 흥하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승희와 이상설이 1909년에 만든 한인촌이다. 110만평에 달하는 황무지를 매입하고 개간하여 나온 소출로 민족교육을 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다시 버스에 오른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한흥동이 있던 마을에 도착했다. 한흥동은 한국을 흥하게 하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승희와 이상설이 1909년에 만든 한인촌이다. 자그마치 110만평에 달하는 넓은 황무지를 매입하여 개간한 것이다. 이렇게 넓은 땅에서 거두어들인 생산물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교육을 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할 수 있었다. 10여 년이 지난 1920년에는 서일 총재가 이곳으로 와서 항일투쟁의 재기를 모색할 수 있었다. 황무지를 개척하여 군자금을 대주고 독립운동에 동참했던 수많은 한인들의 피와 땀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밀산 십리와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 안창호 선생 등 조선신민회 회원들과 미주 국민회가 이곳 밀산 십리와 땅을 사들여 500여 가구를 이주하여 한인촌을 건설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밀산 십리와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 안창호 선생 등 조선신민회 회원들과 미주 국민회가 이곳 밀산 십리와 땅을 사들여 500여 가구를 이주하여 한인촌을 건설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버스로 한 시간 반을 달려 밀산시 십리와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에 도착했다. 입구가 풀에 가려져 찾아가기 쉽지 않았는데, 그곳에는 우리보다 먼저 답사하는 단체가 있었다. 광복회 광주전남지부가 답사왔다. 인적이 드문 이곳을 찾아온 사람이 우리뿐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치 독립군을 만난 듯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기념비 뒷면에 새긴 비문을 읽어보니 안창호 선생 등 조선신민회 회원들과 미주 국민회가 이곳 밀산 십리와 땅을 사들여 500여 가구를 이주하여 한인촌을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먼 미국 땅에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참아가며 힘든 노동을 해서 벌어들인 5만 불이라는 값진 돈을 나라의 독립운동에 기꺼이 내어주었을 민초들.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뒤에는 이렇게 많은 이름 없는 민초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중국 목단시의 팔녀투강비. 1938년 만주지역의 중국, 조선 등 항일단체들이 연합한 동북항일연군 소속 여자 대원 8명이 일본 토벌대를 유인한 뒤 목단강으로 투신한 것을 기념하는 조각상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중국 목단시의 팔녀투강비. 1938년 만주지역의 중국, 조선 등 항일단체들이 연합한 동북항일연군 소속 여자 대원 8명이 일본 토벌대를 유인한 뒤 목단강으로 투신한 것을 기념하는 조각상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다음날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답사한 곳은 목단강 팔녀투강기념상이었다. 1938년 만주지역의 중국, 조선 등 항일단체들이 연합한 동북항일연군 소속 여자 대원 8명이 일본 토벌대를 유인한 뒤 목단강으로 투신한 것을 기념하는 조각상이다. 이들 8명의 대원 중 2명이 조선족 여인으로 기념상에서 치마저고리를 입은 두 명을 찾아볼 수 있다. 조각상의 뒤 벽면에 있는 여덟 명의 이름 중 안순복, 이봉선의 이름 아래 조선족이라는 글이 뚜렷이 새겨져있다.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불의에 저항하는 역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경을 초월해서 이어져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답사지였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만주 땅에는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렇게 넓은 땅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와 땀을 흘렸을까. 아직도 그 후손들의 삶의 터전으로 우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땅이다. 답사를 오기 전에는 해외독립운동지역의 몇몇 지도자들의 이름과 사건명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답사를 통해 독립운동은 결코 민초들의 지지와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런 한인촌을 기반으로 하여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이어나간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력에 큰 피해를 입은 적도 있었지만 우리 민족은 해방이 되는 그 날까지 독립운동을 멈춘 적이 없었다. 저항하고 투쟁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당당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강해졌으며 민족의 얼과 혼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팔녀투강비 답사를 끝으로 가슴과 혼이 뜨거웠던 뜻깊은 탐방을 마무리 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팔녀투강비 답사를 끝으로 가슴과 혼이 뜨거웠던 뜻깊은 탐방을 마무리 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자신이 살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땅을 개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한다면 결코 외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그런 어려운 길을 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안락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큰 사명감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 옳은 길인지는 우리의 혼이 먼저 안다. 다시는 나라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다시는 외세에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민족의 역사를 기억하고 민족혼을 지키는 일에 기여하는 삶을 선택한 뜻깊은 답사였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