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고자 중국 각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한국광복군의 창군 79주년 기념행사가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렸다.

(사)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김영관)는 17일,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박삼득 국가보훈처장, 김원웅 광복회장 등 내외빈을 비롯해 애국지사들과 각계 인사, 시민 300여 명이 참석했다.
 

(사)한국광복군동지회는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사)한국광복군동지회는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이번 기념식을 주관한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대일항쟁기 한국광복군은 정식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여 항일전에 돌입하였고, 중국과 미국, 영국 등 연합국과 협동작전을 수행하며 일제 암흑기에 고통받던 국내외 국민에게는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한제국군, 의병, 독립군, 광복군, 오늘의 대한민국 국군으로 이어지는 군맥을 이어받아, 국맥계승과 더불어 단절 없는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앞으로도 우리 광복군은 정신적으로나마 조국의 위기 앞에서는 언제나 앞장설 것이다. 광복군 노병들은 세월따라 불원 사라지겠지만, 광복군은 죽지 않고 조국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이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이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이어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은 “1940년 오늘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정신력을 가진 강한 군대였다. 의무도, 강요도 아닌 자발적 독립 의지로 무장한 광복군은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불굴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광복군의 멈춤 없는 항일독립투쟁을 비롯해 수많은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조국광복이라는 가슴 뜨거운 역사를 맞을 수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의 군대였던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토대가 되어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국광복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위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님들의 위국헌신에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며 축사를 했다.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서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서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영상으로 축전을 보낸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광복군은 30여 년에 걸친 대한제국군과 독립군의 항일투쟁 정신을 계승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 숭고한 정신은 우리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 국방부는 광복군의 위대한 유산을 토대로 국군의 기틀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광복군의 숭고한 헌신 위에 기적을 이룩해 낸 대한민국이 새로운 100년을 열어나갈 수 있도록 군 본연의 역할에 더욱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축사에서 “79년 전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날로, 군대를 보유한다는 것에 있어 의미가 매우 크다. 당시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중국의 장개석 총통을 만나 끊임없이 설득하면서 우리 광복군은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1950년 7월 14일 이후 69년 동안 미군이 가지고 있다. 국방비로 약 46조 원의 예산을 쓰고서도 정작 미군의 명령 없이는 어떠한 작전도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 광복군의 창군을 축하함과 동시에 우리 국군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고 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김원웅 광복회장이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축사 이후 유재우 육군사관학교 생도대표가 광복군 선언문을 낭독했다. 뒤이어 국군 4중창단이 독립군가와 용진가를 합창했으며, 행사 막바지에는 참가자들이 다 함께 '압록강행진곡'을 불렀다.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서 유재우 육군사관학교 생도대표가 광복군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서 유재우 육군사관학교 생도대표가 광복군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 가릉빙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 전례(成立典禮)를 가짐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주축으로 대일(對日) 선전포고(宣戰布告)를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또한, 중국 내  독립전선에서 중국군과 협동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면서 영국군과도 연합하여 인도·미얀마 작전에 참가했다.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애국지사들과 내외빈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한국광복군 창군 제79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애국지사들과 내외빈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한국광복군은 ‘광복(光復)’이라는 간행물을 발간하고, 방송과 선전지를 전·후방에 확산하여 애국청년은 물론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청년을 유치하는 데에도 힘썼다. 또한,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공동으로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제의 빠른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하면서 광복 이후 한국독립문제에 관하여 임시정부는 발언권을 잃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광복군에도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마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만 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했으며 1946년 6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