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지청천 장군을 201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서울에서 태어난 지청천 장군은 1940년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건되자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광복 직후까지 한국광복군을 총지휘하였으며, 환국할 때까지 중국대륙에서 중국, 미국 등과 힘을 합쳐 일제 타도와 조국광복을 위해 맹렬히 활동하였다.
독립기념관은 지청천 장군의 공훈을 기려 9월1일부터 30일까지 한달 동안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 6관 통로)에 지청천 사진 등 8점을 전시한다.
지청천 장군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월 7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관명은 석규(錫奎)이고 아명은 수봉(壽鳳)이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신식 학문을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황성기독교청년회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을 길렀다.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해지자 이에 맞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9년 9월 통감부의 압력으로 대한제국 군부가 폐지되고 학교도 문을 닫으면서 지청천은 일본 육군유년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14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재임하던 중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국내로 돌아와 남만주로 망명한 그는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성대장을 거쳐 교장으로 독립군 간부 및 병사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사회를 기반으로 성립한 중학과정의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개교식에서 장군이 한 연설이 유명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
장군은 1921년 3월 한인 무장세력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독립단’으로 개편된 후 군사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하순 홍범도·안무(安武) 등의 부대와 함께 장군 휘하 부대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는데, 장군은 이 부대의 주요 간부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25년에는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에는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부(府) 통합운동에 노력했다.
하지만 점차 만주에서 일제의 독립군 탄압이 심해지자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로 이동했다.
장군은 다시 만주로 돌아와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 등을 역임하며 계속해서 만주를 무대로 독립군을 이끌었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군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취임하여 중국의용군과 합세하여 주로 하얼빈(哈爾濱) 부근의 북만주 일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1933년 6월 중국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간도임시파견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대전자령 전투는 ‘군수물자 노획’이라는 측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최대 성과였다.
1938년 임시정부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군무부장을 겸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군사부문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장군은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에서는 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만주 등지를 무대로 전개된 무장 독립군의 이념과 정통성을 임시정부로 계승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장군은 한국광복군을 이끌며 일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는 대일항전 구상 아래 병력 확충에 앞장섰고 영국, 미국군 등 연합군과 합작 등을 추진하였다. 그의 장남 달수와 차녀 복영도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한 후 1947년 4월 환국한 장군은 1948년 5월 총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48년 8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초대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2대 국회의원, 국방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던 그는 1957년 1월 15일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평생을 무장투쟁과 독립전쟁에 헌신한 지청천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