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중근(1879.9.2~1910.3.26) 의사’를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중근(1879.9.2~1910.3.26) 의사’를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중근(1879.9.2~1910.3.26) 의사’를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즉, 고려말 대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安泰勳)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海西) 일대에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의사는 8세 때인 1886년부터 약 8~9년 동안 조부의 훈도로 유교경전 등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의사는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의사는 산동(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포스터=국가보훈처]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포스터=국가보훈처]

 

이후 의사는 그해 3월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진남포에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부인의 금반지와 은반지, 비녀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조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해져 갔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되자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안 의사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1908년 연추(煙秋)에서 의병부대 동의회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 단지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 무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를 처단할 결심을 하였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인물들은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 최재형, 유진률(兪鎭律), 이강(李剛), 우덕순(禹德淳) 등이 그들이다. 그중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의사는 이토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의거 장소.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쏘아 처단하였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의거 장소.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쏘아 처단하였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1909년 11월 의사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일제 관리들은 위세를 부리며 중죄인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의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저들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통렬히 공박하여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일제 관리 또한 그의 의로운 기개에 감복하여 특별히 우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판정에서는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장의 신문에 이토 히로부미는 누차에 걸쳐 대한(大韓)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 인도의 적이요, 우리 대한 신민(臣民) 만대의 원수인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하였다.

의사는 또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불법무도한 일을 제 마음대로 하여 동양평화를 교란한 사실 등 15개조의 죄상을 들어 서면으로 저들에게 제출하여 다시금 이토 히로부미를 논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은 목적의 일부를 달성한 것이요, 정작 큰 소원은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임을 주장하였다.

하얼빈에서 열하루.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을 '하얼빈에서 열하루'라 제목으로 날자별로 소개한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 사진]
하얼빈에서 열하루.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을 '하얼빈에서 열하루'라 제목으로 날자별로 소개한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 사진]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으나 재판은 일본인들만에 의해 진행되었고, 2월 14일 공판에서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의사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 저술을 끝내고 『동양평화론』의 저술을 시작하였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안 의사의 목숨을 빼앗아,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의사는 당초 『동양평화론』을 ①서(序) ②전감(前鑑) ③현상(現狀) ④복선(伏線) ⑤문답(問答)으로 구성하여 저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집필 도중 순국으로 실제는 서와 전감의 일부만 남기게 되었다. 순국 직전에 아우 정근(定根)·공근(恭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고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業)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부터 순국하기 바로 직전인 3월26일까지 230여 점에 달하는 붓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쓴 글귀가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이다.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잇속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라는 뜻이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