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12년 전인 1907년, 고종황제로부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밀령을 받은 이준 열사는 을사늑약이 일제의 협박으로 인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려 했다. 그러나 일제의 악독한 방해공작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병사했다. 
 

이준 열사의 순국 112주기를 추모하고자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는 지난 14일, 서울 강북구 이준열사 묘역에서 ‘이준 열사 순국 112주기 추모제전’을 개최했다. [사진=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
이준 열사의 순국 112주기를 추모하고자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는 지난 14일, 서울 강북구 이준열사 묘역에서 ‘이준 열사 순국 112주기 추모제전’을 개최했다. [사진=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

이준 열사의 순국 112주기를 추모하고자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는 지난 14일, 서울 강북구 이준열사 묘역에서 ‘이준 열사 순국 112주기 추모제전’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유족대표인 조근송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 허현 광복회 부회장, 정호성 전 자유한국당 수석부대변인,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 등 내빈을 비롯해 50여 명이 참석했다.

‘순국 112주년 추념제전 봉행위원회’, ‘리준만국평화재단’이 공동으로 주관한 이날 추념제전은 조근송 명예회장의 인사말과 정호성 전 수석부대변인의 열사 생애 보고를 시작으로 엄수되었다. 이어 허현 광복회 부회장이 김원웅 광복회장의 추념사를 대독하였으며 이기후 우사김규식박사기념사업회장과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추념사를 했다.
 

지난 14일, 서울 강북구 이준열사 묘역에서 ‘이준 열사 순국 112주기 추모제전’에서 유족대표인 조근송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
지난 14일, 서울 강북구 이준열사 묘역에서 ‘이준 열사 순국 112주기 추모제전’에서 유족대표인 조근송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재건위원회]

이후 김영기 재건위원회 이사가 ‘열사가 남기신 말씀’을 낭독하였으며, 임순화 시인이 추모 헌시를 낭독했다. 이어 참가자들의 헌화와 분향으로 추념제전이 마무리 되었다.

일성 이준 열사는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구 중산리)에서 부친 이병관 공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준 열사는 세 살이 되던 해인 1861년, 아버지가 별세한 후 이어 어머니도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으나, 당대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조부 이명섭과 숙부 이병하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처음에 지은 이름은 성재(性在)였으나, 그 후 향시(鄕試)를 보게 되었을 때 이름을 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로 고쳤다가 나중에 준(儁)으로 개명했다. 아호도 해사(海史), 청로(靑露), 해옥(海玉)으로 했다가 나중에 일성(一醒)으로 고쳤다.
 

일성 이준 열사 초상화. [사진=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일성 이준 열사 초상화. [사진=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1875년,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형조판서인 김병시, 최익현 선생 등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1884년에는 함경도시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며, 1888년 북청에서 가재를 털어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진력하였다. 1894년에는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나 갑오경장으로 김홍집 등 개화파에 의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자 사직하고 다시 상경하였다.

1895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의 첫발을 디디어 대관중신들의 비행과 불법을 들추어내고 올바른 법 집행을 하여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오래있지 못했다.

이후 선생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게 되고, 협성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하여 독립신문 간행, 독립문 건립, 가두연설 등 맹활약을 한다. 이후 개화파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동경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비정탄핵(秕政彈劾) 등의 내용으로 가두연설을 하였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02년 44세 때 민영환, 이상재, 이용익, 이동휘 등과 함께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04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으려 하자 「대한보안회」를 조직하여 이를 막기 위한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친일매국 집단인 일진회(一進會)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 맞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직을 맡아 친일파 대신들이 일삼는 가혹한 징세(徵稅)와 재물 약취 등의 비리를 서슴없이 탄핵하였다. 그러나 항일투쟁과정에서 간신들의 모함에 빠져 검거된 뒤 일방적인 재판을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05년, 민영환과 이용익 등의 주선으로 형지에서 석방된 이준 열사는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다시 항일국민운동을 추진해 나아갔다. 1906년 이준 열사는 ‘만국청년회’ 회장에 취임하여 국제친선운동을 전개하였고, 정부에 ‘국정 구폐 진언서’를 제출하였다. 같은 해에 ‘국민교육회’ 회장에 재선되어 이동휘, 이갑, 안창호, 유정수, 유승겸, 홍재기 등과 국민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하였다.

열사는 한북흥학회 회장으로 서우학회와 합동하여 ‘서북흥학회’를 발족하고, 이갑, 안창호, 이종호 등과 교육 사업에 총력 집중하면서 서북흥학회를 모태로 ‘오성학교’(지금의 건국대학교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광신중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법안연구회’ 회장에 취임하여 법안과 법 운영 등에 관해 연구하였고, 법안연구회를 확대시켜 홍재기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해 헌법을 속히 실행하여 인권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이준 열사는 도산 안창호와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안중근 의사의 요청으로 진남포의 삼흥학교에서 애국 강연을 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친일파이자 탐관오리였던 이하영, 김낙헌을 고발하고 공개재판에서 준엄하게 그 죄상을 추궁했다.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하여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여 일본에서 얻어온 차관을 상환하기 위한 거국적인 모금운동을 벌였으나 일진회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같은 해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열사는 비밀리 고종 황제를 만났다. 그는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고종은 당시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특사로 정사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인 선생과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임명해 이준 열사와 함께 보냈다.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인 공고사를 제출하고 한국의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세 특사들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각국대표와 언론에 공개하자 각국 언론들은 동정적이었으나 열강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일제는 이러한 특사들의 노력에 위기감을 갖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특사들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3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부당성을 웅변으로 호소 하였다.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설명하였으며 '평회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 하였다. 7월 9일에는 협회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 할 기회를 얻어 이위종으로 하여금 불어로 연설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이 공례를 빙자하여 한국의 청원을 공감하지 않자, 이준 열사는 분격을 금하지 못하고 연일 애통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한을 남긴 채 순국했다.

이후 이준 열사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1963년 10월 4일 헤이그에서 열사의 유해를 모셔 국민장을 거행하고, 서울 강북구 수유리 묘소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