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신건식·오건해 선생이 선정됐다.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신건식 (申健植, 1889. 2. 13.~1963. 12. 8) 선생과 부인 오건해(吳健海, 1894. 2. 29.~1963. 12. 25) 선생을 2018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신건식, 오건해 선생 가족사진. 왼쪽부터 오건해, 신순호, 신건식. [사진=국가보훈처]
신건식, 오건해 선생 가족사진. 왼쪽부터 오건해, 신순호, 신건식. [사진=국가보훈처]

신건식 선생은 1889년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하여 덕남사숙에서 공부하다 상경하여 무관학교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11년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한 후 항저우에 있는 의약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912년 신채호, 신규식 등이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와 함께 형 신규식·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문일평(文一平)·박찬익(朴贊翊)·조성환(曺成煥)·김규식(金奎植) 등이 동제사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사원의 수는 3백여 명에 이르고 구미(歐美) 등 해외 각지에는 분사(分社)를 두기도 하여 광복운동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1923년 4월 그는 중국군(中國軍) 중교(中校)로 항주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1925년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외과주임으로 근무하며 난징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와 학생 등의 숙식 경비를 지원하였다. 1937년부터 난징에서 광복진선선전부에 소속되어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1939년에 중경(重慶)으로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되어, 1945년 광복 때까지 입법 활동을 통하여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신건식 선생은 1942년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국광복군의 지휘권을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간섭하자 의정원 동료의원과 합심하여 이를 되찾아 왔다. 1943년 재무부 차장으로 선임되었고, 의정원 분과위원으로 재정, 예산, 결산을 담당하며 재정분야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오건해 선생은 1926년 무렵 남편 신건식 선생이 있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이동녕, 박찬익 등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938년에는 ‘남목청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김구 선생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여 소생시켰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과 1942년 한국독립당에 의욕적으로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신건식·오건해 부부는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 등 가족이 독립운동에 나선 명문가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 부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과 201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