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유인태)는 신채호(1880∼1936) 선생 탄신 138주년 기념식을 지난 12월 8일(토) 충청북도청 대회의실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하였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1880년 11월 7일 할머니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에서 출생했다. 이후 아버지 사망 후 할아버지와 함께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돌아왔다.

이날 추모식에는 장선배 충청북도의회 의장, 김병우 충청북도교육감, 한범덕 청주시장, 김수갑 충북대학교 총장, 궐율정 국립대전현충원장, 임규호 충북남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한 많은 시민이 참석했다. 

지난 8일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38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문현진 기자]
지난 8일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38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문현진 기자]

기념식은 개회사, 단재선생 연보, 헌사, 헌시낭송, 축사, 제12회 전국단재역사퀴즈대회·제9회 전국단재청소년글짓기대회 시상, 폐회 순으로 진행되었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유인태 상임대표는 헌사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가 되찾아야 할 나라가 무엇인지, 우리가 다시 건설해야 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며, “우리는 당신의 뜻을 받들어 한민족의 역사를 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38주년 기념식에서 유인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헌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38주년 기념식에서 유인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헌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어, 박원희 시인이 헌시 ‘꼿꼿이 서 있는 나무, 단재 신채호’를 낭송했다. “역사를 잊으면 나라도 없어지는 법. ···꼿꼿이 선 조선 나무가 있다. 잠들지 않는 정신이 있다.”

장선배 충청북도의회 의장은 축사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얼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남아있다.”며, “특히 단재 선생이 이룬 역사적 위업을 잘 살펴 우리 민족의 진정한 가치를 새겨야 한다.”고 밝혔다. 

장선배 충청북도의회 의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장선배 충청북도의회 의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김병우 충청북도교육감은 축사에서 “아주 어두웠던 대일항쟁기 시절 단재 선생은 애국계몽언론인, 민족스승, 민족문학가, 민족사학자로서 나라에 헌신하셨다.”며, “최근에는 청주에 단재 선생의 호를 딴 단재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고 말해 청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김병우 충청북도교육감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김병우 충청북도교육감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시종 충청북도지사가 미리 보낸 축사를 관계자가 대독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애국선열들의 헌신 때문에 가능했다.”며, “독립운동기간 단재 신채호 선생은 굳건한 중심 역할을 했던 조선의 기둥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 6월에 개최되었던 제12회 전국단재역사퀴즈대회와 제9회 전국단재청소년글짓기대회에서 입상자에게 상을 수여했다. 글짓기 대회의 대상 격인 단재상은 유봉여중 1학년 김하은(14세, 춘천)양이 수상했다. 퀴즈 대회의 단재상은 청주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정지호(19세, 청주)군이 수상했다.

이날 기념식에 참가한 한 시민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활동과 위업이 너무 많아 다 알기 힘들다.”며, “그 많은 일들이 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뭉클하다.”고 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1.7~1936.2.21)선생은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에서 출생했다. 6세 때부터 한학 공부를 시작했고,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신동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8세 때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사저에서 신·구 서적을 섭렵하며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 때,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당시 서울에선 독립협회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선생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했다. 그러나 22세 때인 1901년, 일제에 의한 탄압을 피해 문동학원에 부임하여 신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위암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언론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해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됨에 따라 황성신문의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의 논설로 조약을 규탄하자 일제는 황성신문을 폐쇄 처분하였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의 공식적인 사주(社主)는 영국인 베델(E. T. Bethell)이었다. 선생은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일제 통감부의 보안규칙이나 신문지법에 저촉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진력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 때부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 애국적 계몽논설과 사론을 집필하고 ‘독사신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역사물을 연재하였다.

1907년에는 도산 안창호에 의한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민족경제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또한 주시경과 함께 국문전용의 여성잡지인 <가영잡지>의 편집인이 되어 부인층의 계몽에도 노력하였다.

1910년 4월 신민회 간부들과 선생은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다음해 1911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에는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중국에 있는 한국청년들의 민족교육에 매진했다. 아울러 선생은 역사 연구가 곧 민족독립운동의 중추라고 인지하고 ‘국사는 곧 국혼(國魂)’이라는 역사인식을 전파했다.

1920년대에 들어 선생은 칩거의 기간 속에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를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대만에서 일종의 위조수표를 확보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가 1928년 5월 8일 그 연루자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