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지켜낸 우리 역사
사랑으로 지켜낸 우리 역사
  • 민성욱 박사
  • k-spirit@naver.com
  • 승인 2018.11.29 16:1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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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성욱 박사

역사 수업에서 과제를 발표하던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역사에 관심이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있노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 학생은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있긴 한 것일까?”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역사를 교과서 안의 내용만 역사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교과서 밖에는 우리의 삶 자체가 역사이기에 역사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기에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삶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역사를 우리의 삶과 격리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 동안 역사교육이 얼마나 잘못되어 왔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학력을 평가해서 우열을 가리기 위한 공부를 해 왔고,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도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지만 앞 다투어 경쟁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 역사를 존재는 하되 오래 전에 죽은 미라와 같은 역사로 만들어 버렸다. 역사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 사랑하면 할수록 역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한다. 이것이 바로 과거를 이야기하되 현재에 존재하고 미래에 살게 하는 역사의 의미이자 가치이다.

오늘의 스토리는 외세에 맞선 항쟁의 역사이다.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과 빛나는 얼을 만날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고려 시대 때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도, 진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이동하면서 끝까지 저항하였던 삼별초의 항쟁, 조선 시대 때 임진왜란 당시 의령지역에서 최초로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제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났던 수많은 의병, 또 그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군은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1905년 을사년에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사실상의 국권이 상실된 이후 을사의병이 일어났고 1907년 정미년에 군대가 해산되자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결국 1910년 경술국치로 껍데기만 남아있던 대한제국의 국권은 그렇게 상실되고 말았다. 당시 조선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물어야 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제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대일항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안중근 장군이 만주 하얼빈역에서 동양 평화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삼일 항쟁과 그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대일항쟁을 위해 고구려와 발해의 옛 지역인 만주에서 독립군과 광복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국내ㆍ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 끝에 불꽃처럼 사라져 갔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첫 장면에 등장하기도 했던 신미양요는 서기 ​1866년 6월 10일에 제너럴 셔먼호 침몰 사건 때문에 1871년 5월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다.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했다. 화력과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 결사항전을 함으로써 미군의 침략을 저지하였던 광성보 전투,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350여 명의 조선군이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미국군은 3명이 죽었다. 낡은 갑옷을 입고 창과 칼, 돌멩이로 조선군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항전했는지, 그 당시 미 해군 소령으로 전투에 참전한 윈필드 슐리는 자신의 회고록에 조선군의 용맹한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조선군은 노후화된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용감히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미군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조선 군대의 용맹함과 애국심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한국 근대사에서 3번의 기회가 있었다. 우선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왕권 강화와 민생안정을 위하여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경복궁 중건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등 충분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함으로써 결국 실패하였다. 다음은 북학파(실학파)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 중 김옥균, 박영효 등 젊은 엘리트들이 주도한 개혁으로 갑신정변(1884년)이라고 한다. 삼일천하로 끝나버린 갑신정변 또한 충분한 합의와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집권자의 개혁과 젊은 엘리트들의 개혁마저도 실패로 돌아간 다음 마지막 남은 개혁세력은 민중, 특히 농부들이었다. 그들이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고, 처음에는 반봉건을 내세웠지만 일본군이 참전하자 반외세로 바꾸게 된다.

1894년 갑오년은 조선에게는 그야말로 운명의 해였다. 그해 봄, 정부 관리들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지도부를 중심으로 전라도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무력 봉기했다. 바로 동학농민전쟁의 시작이었다.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을 기치로 내건 농민군은 정부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무장에서 봉기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 전주성을 점령했다.

스스로 농민군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청군이 개입하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은 즉시 히로시마에 대본영(일본의 전시 최고 사령부)을 설치하고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를 알게 된 농민군은 외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조선 정부에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해 각자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농민군이 물러남에 따라 조선 정부는 일본에 철병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복궁과 그 주변 서울의 중추 지역을 점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삼아 조선 정부를 일본에 종속시킬 치밀한 계획을 수립한다.

나라의 위기에 직면한 동학농민군은 10월 하순부터 다시 본격적인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등의 북접 농민군은 부산과 서울 사이에 설치된 일본군의 병참선을 습격했다. 전봉준 등이 이끄는 전라도의 남접 농민군은 대거 서울로의 북상을 준비했다.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파견된 일본군 부대의 목적은 동학농민군을 조선의 남서부로 밀어붙여 섬멸(‘모조리 살육’)하는 것이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의 패배 이후 농민군은 점차 흩어져서 갔고, 일본군과 관군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추격과 토벌 작전에 나섰다. 전라도 서남 끝에 몰린 농민군은 장흥과 강진에서 최후의 조직적인 대규모 항전을 펼쳤지만, 결국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농민군의 일부는 진도로 들어갔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많은 병력을 진도로 보냈고, 3일간의 전투 끝에 동학농민군은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던 한국인들, 이름을 뭐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조상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그들의 희생 뒤에는 거룩한 사랑이 존재하였다. 한민족의 건국이념이자 통치이념이기도 한 홍익, 또 다른 이름이 사랑이다.

의병은 신분의 제한이 없었다. 외세에 맞서 제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만 있었다면 누구나 의병이 될 수 있었다. 이름 없는 무명의 의병, 그들의 이름이 없어 무명이 아니다. 제 나라를 지키는데 굳이 이름을 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비로 백정으로 아녀자로 유생으로 천민으로 살아가던 그들이 원한 단 하나는 돈도 이름도 명예도 아닌, 제 나라 조선의 ‘주권’이었다.

강화도 광성보 전투에서 무기와 군사력의 열세에도 세계 최강 미군에게 굴복하거나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수비대는 전멸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장 포수의 아버지는 신미양요 때 목숨을 잃는다. 내가 없으면 여기는 누가 지키느냐고 그렇게 끝까지 남아 항전했던 장 포수의 아버지, 1871년 신미년 강화도 초지진과 광성보에는 수많은 장 포수 아버지들이 있었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는 나라의 위기 때마다 목숨 걸고 지키려는 선조들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후손은 동학농민군과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의병의 역사는 경술국치 후 삼일항쟁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으며, 독립군과 광복군이 되어 대일항쟁을 이어갔다. 그들의 대부분은 매일 가족의 끼니를 걱정해야했던 가난한 소작농이거나 평범한 농부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았고 어떠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또 죽을 것을 알면서도 외세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가족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가족이 살고 있는 터전을 지키려고 하였다. 내가 지키지 못하면 나와 같은 사람들이 소중한 것을 잃게 되기 때문에 목숨 걸고 지켜야만 했다. 우리 역사는 위대한 사랑인 홍익인간으로 비롯되었고, 그것을 지켜 내고자 외세에 저항하였고 홍익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역사를 이어 왔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다를 지니라.”

조선 정조 때 문장가 유한준 선생의 어록이다. 이 어록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문에 수록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그리고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뜻으로도 회자되고 있다.

사랑하면 뇌의 송과체가 반응한다. 공감능력이 좋아지고 영감이 떠오른다. 그래서 사랑하면 문학적 감수성과 예술성이 부각이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알고 싶어진다. 이렇게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되면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 보이고 몰랐던 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상대를 위해 배려하고 소통하려 한다. 즉 하나가 되려고 한다. 홍익 또한 모두가 하나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 과정에서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삶이 행복으로 충만해 지고 평화로워 진다.

“역사에 관심이 없나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수많은 장포수의 아버지 같으신 분들이 사랑으로 지켜낸 우리 역사입니다.”

수많은 장 포수의 아버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라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치를 아는 방법이 우리 역사 속에 있다고.”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관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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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물 2018-12-03 09:45:01
역사는 사랑이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버블티 2018-11-29 17:56:15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