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령 옛길에서 만나는 인문학의 가치
남태령 옛길에서 만나는 인문학의 가치
  • 민성욱 박사
  • k-spirit@naver.com
  • 승인 2019.05.0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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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성욱 박사

따스한 봄날, 거주 지역인 과천의 곳곳을 산책하며 지역 문화재와 역사에 관해 문화관광해설사의 깊이 있는 해설을 듣는 ‘역사문화산책’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주말이라 쉬고도 싶었지만 운동 삼아 걷고, 걸으면서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을 체험하고 싶어서 걷기 싫어하는 아내를 설득하여 함께 동행하였다. 이날 여정은 과천길로 과천지름재길 - 백토 광산지 - 남태령 망루 - 남태령 옛길로 이어졌다. 옛날 옛적에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거쳤다는 남태령 옛길을 걸으며 옛 선비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출발은 관문사거리 한 모퉁이에 있는 당산, 즉 성황신목에서 였다. 원래 길 한 복판에 서 있던 것을 1976년 도로확장을 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한 성황신목은 바뀐 환경 탓인지 곧 고사하였다. 고사한 나무 안쪽에 어린 나무를 이식하여 마치 신목 안에서 다른 나무가 자라는 느낌을 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지 않지만 마을 주민들이 옛 나무가 죽었더라도 그 자리에 새 나무를 심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대동(大同)의 의미를 이어 나가려는 정신이다. 그 정신이 발현되었던 덕분인지 오래된 신목은 어린 나무로 다시 환생하여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전통문화 계승과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주민들의 공동체 형성을 위하여 마을에서는 매년 10월 1일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예로부터 동네의 큰할머니와 제의 전 과정을 의논하여 진행하였으며, 제물로 쓰이는 시루떡은 항상 3시루씩 하는 데 각각 도당신, 도당할머니, 구릉대감께 바친다고 한다. 이것 또한 ‘천지인’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성황신목제는 동네사람들이 참여하는 대동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는데, 제사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참석하지 못한 집에까지도 음식을 나누어 줄 정도로 마을의 공동체의식을 심어주는 행사였다. 대동(大同)은 ‘모두가 하나다’ 라는 뜻으로 ‘홍익인간’의 또 다른 표현이다.

국가 행사로 치러졌던 제천행사가 민간으로 전승되어 마을 어귀에 신목으로 지정된 아름드리나무에 새끼줄을 걸고 그 새끼줄에 오색천이 주렁주렁 걸리며 나무 밑에는 돌 더미를 만들어 놓고 마을수호, 액운퇴치, 소원성취 등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돌 더미는 제단을 상징하고 돌을 쌓는 것은 도력을 쌓는 것을 의미한다.

남태령을 넘는 또 다른 길인 지름재길에서 역사문화산책을 시작하였다. 가는 길 곳곳에 관악산 둘레길과 경기도 삼남길의 표식들이 보였다. 관악산 둘레길은 과천, 안양, 서울시 경계를 둘러싸고 있는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역사와 생태를 배우는 자연 탐방로이다. 경기도 삼남길은 과천에서 평택까지 약 90km에 달하는 길로 옛길이 지닌 역사성을 최대한 살린 역사문화 탐방로 이다. 사실 경기도 삼남길은 조선시대 6대 대로 중 한양과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 지방을 잇던 1,000리에 달하는 긴 길이었던 ‘삼남대로’ 의 일부이다. 이러한 ‘삼남대로’는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으로 과거를 보러 갔던 젊은 선비들이 이 길을 걸었고, 삼남지방의 풍부한 물산도 이 길을 따라 오갔다. 또한 이 길은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하여 현륭원으로 행차하던 길이며,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던 길이고, 삼봉 정도전,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떠났던 길이며,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던 길이기도 하고, 임진왜란과 6·25 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관악산 둘레길과 경기도 삼남길, 그 표식을 뒤로하고 길 따라 올라가니 남태령 옛길 안내도가 나왔다. 안내도에 따르면 남태령 옛길은 한양에서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보길이었다. 즉 이곳을 지나 수원, 안성을 거쳐 해남 땅끝 마을까지 갔으며, 반대로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을 거쳐 노들나루(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이르렀다.

원래 이 고개는 산세가 험준하여 여우가 많았다고 하여 ‘여우고개’ 로 불렸는데, 정조 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원으로 행차할 때 이 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고개 이름을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임금에게 속된 이름을 아뢸 수 없어 ‘남태령(남행할 때 첫 번째 나오는 큰 고개)’이라 아뢴 이후에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남태령 지름재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남태령 3.1운동 만세 시위지’가 가장 먼저 나온다. 이것은 삼일항쟁은 과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남태령 삼일항쟁 시위지는 과천현 주민이었던 이복래 등이 주도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그는 서울에서 삼일항쟁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인근 주민들에게 3월 30일 오후8시까지 남태령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주민들이 모이자 손수 제작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이복래와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함께 과천 읍내로 행진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공립보통학교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삼일항쟁은 1919년(기미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벌어진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4월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이었으며, 이러한 삼일항쟁의 결과, 4월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조직적인 대일항쟁이 가능해 졌던 것이다.

주택가를 지나 점점 산길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우거진 푸른 나무숲과 온갖 봄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런데 산길을 걷다 보면 산책이 아니라 등산이 되고 마는 것이 함정이다. 걷기 싫어하는 아내는 이미 지쳐 있었고, 이게 무슨 산책이냐고 한다. 이럴 때 보통 쓰는 말이 있다.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렇게 독려하며 걷다 보니 남태령 망루와 표지석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망루의 현판에는 ‘과천루’로 쓰여 있는데, 이 망루는 원래 지금 위치가 아닌 첩첩산중에 있었다고 한다. 용도 또한 자연경관을 감상할 목적이 아니라 산적이 고갯길을 지켜보다 오가는 사람들 돈 꽤나 있을 것 법한 사람들을 찾아내 도적질을 하기 위함이었다.

망루가 있는 곳에서 경기도 삼남길 중 제1길 한양관문길이 시작된다. 남태령에서 출발하여 남태령 옛길을 거쳐 과천성당을 지나 다다르는 온온사는 정조 대왕이 능행 당시 묵어간 곳이기도 하다. 관악산 등산로 입구이기도 한 과천향교, 과천시청과 정부과천청사를 지나면 ‘물맛이 훌륭하다’하여 정조 대왕이 당상(정3품 이상)의 품계인 ‘가자’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가자우물’이 맞이한다. 가자우물은 물맛이 좋고 차다고 해서 ‘찬우물’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길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인덕원 옛터에 도달한다.

과천현감은 품계가 종6품으로 낮았지만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한양도성 안의 고관대작을 많이 알았다. 그러다 보니 예산을 확보하려고 하거나 줄 댈 곳을 찾으려는 지방관이나 지방 유지들이 한양도성 내 사정을 과천현감에게 자주 물어보곤 하였다. 요즈음 같으면 과천현감이 컨설팅을 해 준 것이다. 그런데 과천현감이 잘 만나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지방에서 온 지방관이나 유지들은 과천현에 머물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노복 등 식솔들이 많이 따라 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들을 위한 주막촌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천현감 중 대표적인 인물이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이다. 민치록의 선정비는 온온사 입구 역대 현감의 선정비와 함께 있다. 조선시대 과천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가난했다. 그래서 남태령을 넘어가는 선비들이나 행랑객의 봇짐을 도적질하는 산적이 되거나 산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는 과천 주민이 많았다.

다음은 백토광산지이다. 예로부터 과천은 도자기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백토(白土)는 백색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를 지칭하며 과천 무네미골 백토지 부근에서 11~12세기 조질백자 파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백토광산은 대일항쟁기에 가장 흥하였으나, 백토 생산량이 줄어들어 이후 주물사(주물용 모래)를 생산하다 1980년대 초 폐쇄되었다.

이정표에 산적마을이 보였다. 하지만 산적마을 입구에는 줄을 쳐 놓고 못 들어가게 막아 놓았다. 못 들어가게 막아 놓으니 더 궁금해 졌다. 궁금증을 뒤로 하고 무네미골로 내려갔다. 무네미골의 이름은 물이 넘어간다는 뜻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다. 실제 계곡 물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고 약수터도 보였다.

그렇게 해서 처음 출발했던 성황신목에 도달했다. 과천역사문화산책에 참가했던 시민들 대부분이 과천에 살고 있는데, 이런 역사가 존재하는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간혹 듣는 얘기지만 역사라고 하면 옛 역사의 도읍지였던 경주, 공주, 부여 등의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만 역사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관심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잘 몰랐던 역사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웅장하고 찬란한 역사만 역사가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도 역사성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사람들이 만든 창조물이고 기록이기 때문이다.

과천역사문화산책을 진행한 문화관광해설사는 전기공학을 전공하였고 정년퇴임 후 지역 내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우연찮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게 되면서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발견하는 선조들의 지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남태령 옛길을 따라 걸으면서 많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일환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말과 글도 없애려고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신작대로’ 라는 미명하에 옛 길을 다 없애 버렸다. 옛길을 걸어 보니 왜 일제가 옛길을 없애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옛길을 없애면서 예전부터 이어져 왔던 고유한 생활터전을 없애고, 길 위에 존재하던 문화유산을 파괴하였다.

일제는 또한 전국의 관아를 없애고 그곳에 학교를 건립하여 황국신민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각 지역의 거점이자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관아를 없애서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의도였다. 당시 과천관아의 존재여부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알 수 있는 그림이 있다. 풍산김씨 오미동 문중에서 보관해 오던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에는 ‘과천창의도(果川倡義圖)’ 가 있는데, 과천현감 김염조는 병자호란 때 격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과천을 수호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과천창의도’ 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12월 16일 김염조가 관악산에서 청군사와 대처하며 과천현 일대를 수호하는 의병 활동 광경이 담겨져 있다.

조선시대 과천은 지금의 과천시 일대와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 대부분과 서울시 동작구와 서초구 등을 관할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거기에 정조 대왕이 능행길에 머물렀던 ‘온온사’ 라는 과천 행궁이 있었고, 한양의 관문 역할까지 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그 위상에 남달랐다. 그런 과천관아를 그대로 내버려 둘 일제가 아니었다. 과천관아 터에는 지금 과천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과천초등학교는 1912년 과천공립보통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과천관아가 사라진 지가 100년이 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복이 된 지도 꽤 지났고 말살된 민족정신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과천관아는 복원되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일제는 복원되지 못하도록 그 자리에 학교를 건립한 것이다. 과천관아를 복원하기 위하여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학교를 이전하는 것도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될 일이다.

정조 대왕은 즉위 초기에는 과천을 경유하였는데, 창덕궁을 출발하여 노량진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에서 쉬었다가 사당 사거리를 지나 남태령을 넘은 후 과천행궁(온온사)에서 머물렀다가 수원으로 향했다. 1795년부터는 시흥으로 능행길을 바꾸었는데, 그 이유가 여러 설이 있지만 정조 대왕의 애민정신이 담겨져 있다. 능행길에 6,000여 명이 동원되는데 남태령을 넘을 때 과천 백성들이 대거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고초가 컸을 것이다. 그래서 행로를 바꾸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정조 대왕이 과천 행궁인 온온사로 가기 위해 관문교를 지날 때면 과천 백성들이 임금을 환영하고 임금의 효심을 찬양하기 위하여 무동답교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무동답교놀이는 명칭에도 보이듯이 무동놀이와 답교놀이가 복합하여 이루어진 놀이다. 이것이 오늘날 과천지역의 민속문화가 되었다.

이렇듯 옛 길에서 만나는 것은 사람과 자연뿐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간과 자연이 빚어낸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해야만 하는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의 가치이다.

 

* 본 칼럼은 본지의 제작 방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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