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 의병 남편에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 의병 남편에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9.06.02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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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스피릿 선정] 독립운동가 남자현 여사

코리안스피릿은 올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10명을 선정했다. 코리안스피릿이 선정한 독립운동가는 석주 이상룡(1858-1932), 홍암 나철(1863-1916), 우당 이회영(1867-1932), 홍범도 장군(1868-1943), 남자현 여사(1872-1933), 주시경(1876-1914), 단재 신채호(1880-1936), 서일(1881-1921), 김좌진 장군(1889-1930), 이봉창 의사(1901-1932)이다.

5월에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에 이어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南慈賢, 1872.12. 07.~1933. 08. 22.) 여사를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가 자료를 토대로 소개한다.

독립기념관에 있는 남자현 여사의 어록비. 1932년 만주사변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자 남자현 여사는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써서 손가락과 함께 조사단에게 보내 우리 민족의 강렬한 독립정신을 전달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에 있는 남자현 여사의 어록비. 1932년 만주사변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자 남자현 여사는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써서 손가락과 함께 조사단에게 보내 우리 민족의 강렬한 독립정신을 전달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남자현 여사는 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여사는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며 7세 때에 국문에 능통하였고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였다.

19세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 김씨(義成 金氏) 김영주(金永周)에게 시집 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다. 그러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1896년 여사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며 의병에 투신하였다. 남편 김씨는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하고 영양의병장(英陽義兵將) 김도현(金道鉉)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 중 전사하였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여사는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養蠶)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여사는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여사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었다. 여사는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하였다.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 여사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채찬(蔡燦)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 서울 혜화동 28번지 고(高)씨댁에 근거를 두고 거사를 계획하다가 미수에 그치자 삼엄한 경계망을 돌파하고 본거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마침 인근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 등이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고 여사는 독립운동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통합을 독려,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27년 봄 상해 임시정부요인인 안창호 선생이 길림 조양문(吉林 朝陽門) 밖에서 정의부(正義府) 중앙간부와 각 운동단체 간부, 지방유지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석주(羅錫疇) 의사 추도회 겸 민족장래에 관한 강연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일제는 중국 헌병사령관을 협박하여 안창호·김동삼 선생 등 300명을 체포하게 하고 주요 간부급 50인을 신병 인도하도록 하였다.

당시 여사는 투옥중인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가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다. 중국은 우리의 항의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고 체포한 인사들을 보석으로 석방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켜 요녕성뿐만 아니라 길림성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여사를 후원하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은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그곳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묵고 있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아무도 김동삼 선생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사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 면회를 허가 받고 연락책 역할을 해내었다. 김동삼 선생의 지시내용을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동지들의 행동지연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여성다움을 잃지 않았던 여사는 항일운동 중 병들고 상처받아 고생하는 애국청년들에게 항상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길로 간호하며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턴 경)이 침략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일인(日人)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하였던 것이다.

1933년 초 여사는 동지 이춘기(李春基) 등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제거하기로 했다. 1932년에 일어난 5·15 사건의 여파로 군사 참의관 자리에서 물러났던 무토 노부요시는 그 해 다시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돼, 만주국 주재 특명 전권대사와 관동 장관을 겸임하였다.

여사는 그해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 운반 차 하얼빈에 가서 2월 29일 중국인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서 장춘(당시 新京)으로 가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여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여사는 1933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경은 보석으로 석방하였다. 여사는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조모 씨(趙某氏) 여관으로 옮겼으나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여사는 유복자인 독자 영달(英達)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하였다.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여사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南崗) 외국인묘지에 안장하여 입비식(立碑式)을 열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여성으로서 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의 정화(精華)가 되어 찬란한 빛을 남긴 여사의 영전에 동지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여사의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김구·이승만 선생에게 남긴 돈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여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여사의 유해는 1967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1993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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