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1881.1.29 ~1950.12.10.) 선생과 김순애 선생(1889.5.12.~1976.5.17) 부부는 한 마음으로 독립투쟁의 최일선에서 활약한 부부 독립운동가이다.

김규식 선생은 1881년 1월 29일 경남 동래에서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유배로 인해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학당에서 교육받았고, 독립협회 활동과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여 국제정세에 관한 안목을 키웠다. 189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로아노크대학(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고 1904년 귀국하였다.

부부 독립운동가 김규식, 김순애 선생 결혼기념 사진.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규식, 김순애 선생 부부를 2019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부부 독립운동가 김규식, 김순애 선생 결혼기념 사진.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규식, 김순애 선생 부부를 2019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여러 곳으로 강연을 다니며 구국운동을 전개했지만,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김규식 선생은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1913년 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동제사(同濟社)와 박달학원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펼치며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키워나갔고,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며 독립운동 세력 통합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하였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김규식은 1919년 초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5월 12일에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해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하고 각국 대표와 언론인들에게 배포해 한국인의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이후 열강에의 선전활동과 약소 피압박 국가 간의 연합 등 다양한 독립 외교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단결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독립운동전선에 있지 않을 때에는 교육활동에 매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 내에 독립운동 노선으로 갈등이 야기되자, 잠시 임시정부를 떠났다가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과 외무위원을 맡았다.

1933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수천 달러를 모금해 돌아왔다.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고 1944년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의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가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내었다.

선생은 1950년 북한군에 납치되어 그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김순애 선생은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 정신여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김순애는 민족계몽을 위해 교육활동을 펼치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오빠인 김필순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1월 김필순과 막역했던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결혼한 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였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파견된 민족대표의 활동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봉기 촉구에 주력하였다.

임시정부의 전권대표 김규식이 제출한 독립청원서와 외교각서. 외국어에 능통한 김규식은 1919년 초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5월 12일에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임시정부의 전권대표 김규식이 제출한 독립청원서와 외교각서. 외국어에 능통한 김규식은 1919년 초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5월 12일에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선생은 1919년 7월 이화숙(李華淑)·이선실(李善實)·강천복(姜千福)·박인선(朴仁善)·오의순(吳義順) 등과 함께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상해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곤경을 겪게 되자, 1926년 7월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 활동을 하였다. 또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 다수의 간호원을 양성하는 데 주도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1930년 8월 상해에서 김윤경(金允經)·박영봉(朴英峰)·연충효(延忠孝) 등과 함께 한인여자청년동맹(韓人女子靑年同盟)을 결성하여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1943년 2월 23일 충칭의 각계 각파 부인 50여명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고 조직을 재출범시켰으며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1945년 11월 환국하였으며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 선생은 1976년 5월 17일 8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두 분의 공훈을 기려 김규식 선생에게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김순애 선생에게는 1977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규식(1881.1.29 ~1950.12.10.) 선생과 김순애 선생(1889.5.12~1976.5.17) 부부를 2019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독립기념관은 5월1일부터 31일까지 한 달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 전시회에는 김규식과 김순애 선생 사진 등 11점을 선보인다. 또 ‘이달의 독립운동가’ 삼행시 짓기 이벤트를 독립기념관 누리집에서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