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현 박사(단재학당 교장)는 7월 20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린 (사)국학원의 제219회 국민강좌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날 조 박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 단재는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고 했다. 반드시 아(我)인 우리 본위의 역사 기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한때 대륙을 지배했지만 현재는 분단되어 섬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역사관 대립, 국론 분열로 사회적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둘러싼 주변 정세는 복잡하고 우리에게 냉혹하다. 남의 힘에 의지하는 정책으로는 냉혹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한민족의 뿌리정신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도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7월 20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린 (사)국학원의 제219회 국민강좌에서 조병현 박사(단재학당 교장)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정유철 기자
7월 20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린 (사)국학원의 제219회 국민강좌에서 조병현 박사(단재학당 교장)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정유철 기자

이어 조 박사는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였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도리미에서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령으로 신숙주의 18세손이고 고령 신씨는 대과급제 24명, 진사 80여 명 배출하였다.

신채호는 어린 시절 ‘콩죽’으로 연명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아호는 정몽주의 ‘단심가’에 영향을 받아 ‘일편단생’으로 했다가, 이를 줄여 ‘단재’로 고쳐 불렀다.

1896년 17세에 조부 신성우는 손자 신채호의 남다른 능력을 보고서 석헌 신승구와 구당 신병휴(신백우의 부친)에게 한학을 수학하게 하였다. 신성우는 더 많은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신채호를 신기선에게 소개하였다. 1898년 신기선은 신채호의 능력을 인정하여 성균관에 추천하였다. 신채호는 그해 가을 성균관에 입교, 변영만·조소앙 등과 함께 수당 이남규의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성균관장이었던 이남규는 여러 제자 가운데 신채호를 가장 총애했다.

1898년 11월경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투옥, 이때부터 신채호는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1901년 가덕 인차리에서 신규식과 함께 ‘문동학원’을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25세에 일본이 항무지 개간권을 한국정부로부터 빼앗자 신채호는 조소앙 등과 더불어 항일 성토문을 작성하여 일본 정부와 이하응 등의 친일 매국 대신들을 규탄하였다.

1905년(26세) 4월 6일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이를 사직, 단발을 결행하고, 동산 류인식과 더불어 단발 종용 운동을 전개하였다.

성균관 박사직을 사임하고 향리로 내려가 묵정리에서 신백우·신규식 등과 더불어 ‘산동학원’을 개설하였다. 장지연이 신채호를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하였다.

1906년(27세) 『황성신문』이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폐간당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영국인 베델(Bethel)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1907년부터 『대한매일신보』에 본격적으로 논설을 기고하였다. 안창호·이갑·이동녕·이동휘·이승훈·이회영·전덕기 등과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서 활동하고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 외에 가정교육과 여성 계몽을 위하여 순 한글로 발간한 잡지 『가뎡쟙지』에 사원과 주필로 참여하였다.

1910년(31세) 1월 「동양영웅아의 결점」, 「동양혁명사의 결점」, 「연개소문」, 「김준」,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한국과 일본을 합병할 의론을 하는 쟈에게 고하노라」를 등 51편에 이어 3월까지 34편 발표하였다.

조 박사는 “연개소문은 천하의 당 태종 이세민과 으뜸 무장이었던 소정방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 줄 정도로 당대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단재는 《조선상고사》를 쓰면서 유독 심혈을 기울여 복원하고 싶었던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고 말했다.

1910년 4월 국치를 예감하고 기차를 통해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신채호는 중국으로 망명할 당시 순암 안정복의 친필본 『동사강목』을 휴대하였다. 청도에서 안창호·이갑 등 신민회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건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신민회에서는 밀산현에 기지를 마련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여기서 신채호는 국사와 한문 교사를 담당하기로 결정했다. 자금문제로 무관학교 설립이 무산되자 신채호는 노령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 여기서 「독사신론」을 ‘일편단생’이라는 필명으로 『신한국보』에 연재하였다.

1913년(34세) 봄 신채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의 주도로 조직된 同濟社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동제사는 중국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설립한 무역 회사이나 실제로는 항일과 공화주의 독립혁명단체였다. 신규식 등이 창립하였으며, 신건식, 신석우, 신철휴, 조성환, 이극로, 문일평, 민제호, 이범석, 선우혁, 윤보선, 신형호, 이광, 신성모, 조소앙, 정인보, 조동호, 신채호, 박찬익, 변영만, 민필호, 서병호, 홍명희, 김규식, 박은식, 정원택 등이었으며 전성기에 상해 본부에만 300여명의 동제사 비밀결사 요원이 있었다.

박은식·정인보·문일평·홍명희·조소앙 등과 교류, 장차 독립운동을 담당할 청년들의 중국 및 구미 각급학교 유학 예비교육 실시하기 위한 박달학원에서 국사 교육을 담당하였다. 박달학원은 1913년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 안에 설립되었던 교육기관으로 장차 독립운동을 담당할 청년들을 중국 및 구미 각급학교에 유학시키기로 하고, 유학 예비교육을 담당하였다. 강사는 박은식·신채호·홍명희·문일평·조소앙 등과 혁명의 선구자 농죽, 미국 화교인 모대위 등이었으며, 교과목은 영어·중국어·지리·역사·수학 등이었다. 3기에 걸쳐 100여명의 한국 청년을 배출하였다.

윤세용·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만주 봉천성 회인현으로 이동하였다.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동창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독립군 양성소 기지 선정과 바른 역사를 쓰기 위해 남·북만주 일대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 및 백두산 답사하였다. 특히 한국고대사 관련 유적지를 집중적으로 답사하였다.

신채호는 집안을 답사하면서 “압록강상의 집안현, 곧 제2환도성을 언뜻 돌아본 것이 나의 일생에서 기념할만한 장관이라 할 수 있으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陵墓가 모두 몇 개인지 헤아려 볼 여가도 없어서 다만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 개이고 묘가 1만 개 내외라는 억단臆斷을 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이지만 고구려의 종교·예술·경제력이 어떠함이 눈앞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 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하는 단안을 내렸다. 1915년(36세)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신채호는 다시 북경으로 가서 도서관의 이용하여 『조선사』를 연구를 계속하였다. 1916년 3월 소설 『꿈하늘』을 집필하였다. 서문과 전 6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꿈과 애국심을 극화한 자전적 사상소설로서 생존경쟁․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적 인민족자강사상과 전투적인 항일 투쟁의식을 유상적으로 형상화한 신채호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1917년 7월 발기인은 신규식을 필두로 박은식·신채호·박용만·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 등 14명과 함께 임시정부수립을 제창하는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40세) 2월 만주 길림의 대한의군부 주도의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하였다. 3월 한성정부의 평정관으로 선임되었다. 3·1운동 이후 북경에서 상해로 가서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여러 독립운동가와 더불어 임시정부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 대표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승만이 내각책임제의 국무총리로 천거되자, 이승만이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위임통치청원 문제를 들어 신채호는 이를 반대하였다. 7월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임시정부 활동을 하였으며, 임시정부 의정원 전원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8월 이승만이 통합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신채호는 임시정부와의 인연을 끊고, 반임정 활동에 주력하였다. 임시정부 의정원의 충청도 위원에서 해임되었다.

10월 임시정부와 결별한 단재는 상해 보강리 54호에서 『신대한』을 발행하였다. 이는 반임정활동과 무장투쟁론을 선전하는 신대한동맹단 기관지 역할도 하였다. 여운형이 일본에 가자 11월 이를 문제를 규탄하고, 유호국민대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고 유호국민대회에서 선포문을 작성하였다. 12월 항일비밀결사조직 혁신단의 기관지 『혁신공보』에 「우리의 유일요구」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북경으로 이동하여 박용만·고일청·김창식 등과 제2보합단 조직에 참여, 내임장에 선임되었다. 무장투쟁의 독립노선을 강화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였으며, 봉천에서 김동삼·이시영 등과 재만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전력하였다. 이회영 부인의 중매로 26세의 박자혜와 결혼하였다. 박자혜는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간우회 사건을 주동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봉천을 거쳐 북경으로 망명하여 결혼할 당시 연경대학 의학과에서 수학하던 중이었다. 박자혜 여사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되었다.

11월 신채호는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함과 동시에 박숭병·김창숙과 더불어 순한문 잡지 『천고』 간행 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21년(42세) 1월 『천고』 1호를 간행하였으며, 1921년 7월까지 7호까지 간행하였다. 신채호는 창간호에 ‘진공’이란 필명으로 쓴 「조선독립과 동양평화」에서 “금일 동양평화를 말하려면 조선의 독립만 한 것이 없다. 조선이 독립하면 일본은 방자하게 탐욕스러운 데 이르지 않게 된다”고 했다. 2호에선 봉오동 전투, 노두구 전투 등 서간도와 북간도의 독립운동을 소개했다. 3호에서 ‘대궁’이란 이름으로 쓴 기사에서 3·1 운동을 “우리가 죽음에서 삶으로 가게 된 날”이라고 규정했다. 단재는 <천고>에서 진공·대궁·지신 등 다양한 필명으로 대부분의 기사를 손수 썼다.

1922년(43세) 새로운 임시정부의 구성과 독립노선을 위해 국민대표회 개최에 전력, 극심한 생활고로 부인과 아들을 국내로 보냈다. 1924년(45세) 3월 11일 생활고를 해결하고 집필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북경 관음호동 관음사에서 승려생활 시작했다. 「조선사」와 「전후삼한고」를 지속적으로 집필하였다.

조 박사는 “<전후 삼한고>는 단재 선생 최고의 역사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삼한은 한반도 남쪽의 삼한만이 아니라 그 전에 북삼한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삼한이 대륙삼한이고 이것이 후에 한반도 남쪽의 삼한(후삼한)이 되었다는 주장이다”고 소개했다.

1926년(47세) 5월 『시대일보』에 「고구려와 신라 건국연대에 대하여」 사론 3회 연재, 1927년(48세) 1월 홍명희의 요청으로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2월 15일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중앙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북경 및 천진에서 개최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대회 선언문을 작성하고 참석하였다. 동방연맹의 선전 기관지 발간 및 폭탄제조소 설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 위체를 입수, 5월 유맹원이란 가명으로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일본을 거쳐 항춘환 편으로 대만으로 갔으나 대만 기융우체국에서 형사에게 피체되었다.

1929년(50세) 2월 7일 대련지방법원에서 열린 제2회 공판에서 일본 재판장이 “사기 행각을 나쁘다고 생각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신채호는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해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라고 답변하였다. 이는 신채호의 투철한 항일독립운동자로서의 신념과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30년(51세) 5월 9일 대련법정에서 10년형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31년 6월 신백우와 안재홍의 주선으로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조선일보』에 「조선사」를, 10월 15일부터 1932년 5월 31일까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하였다. 11월 16일 『조선일보』 기자 신영우에게 수정, 보완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조선상고문화사』의 발표 중지 요청하였다.

1935년(56세) 오랜 형무소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자 형무소 측에서 다른 사람들의 보증하에 출감을 허락한다고 통보했다. 친지·친구들의 보증과 친일파 부호 한 사람의 보증 받아 출감을 하고자 하였으나, 신채호는 친일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삼천리』에 「조선민족의 전성시대」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동양의 고사(古史)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조선 고문화의 원류를 탐색치 않고는 도저히 사(史)의 근거와 사의 진수와 사의 체계와 통지(統志)를 작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 고문화를 강구(講究)함에는 먼저 조선 구강(舊疆) 판도 범위부터 획정(劃定)하여야 되리니, 고대 문헌의 고증을 어디서 찾아낼 것이냐. 진시황(秦始皇)의 동남전쟁(東南戰爭)은 조선족을 동북으로 구축함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조선·중국의 국계(國界)로 하고, 대공사를 일으켜 만여리로 연장한 것이다.”

아동 교육을 위해 4월 『신동방』에 「성질에 따라 아해들을 가라칠 일」, 10월 「소아교양론」 발표하였다.

홍명희에게 보낸 서한에 구상해 온 『대가야천국고』와 『정인홍공약전』을 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였다.

1936년(57세) 2월 18일 뇌일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유언 한마디 없이 21일 오후 4시 20분 순국하여 23일 화장하였다.

1936년 2월 24일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여 친지 및 각계 유지들의 애도 속에서 청주로 운구되었다. 현재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 249번지에 영면하였다.

조병현 박사는 신채호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으로 △민족주의사학(민족사학)의 창시자, 선구자 △한문학계(漢文學界)의 태두, 조선 유일한 사학자 △ 정세의 천재, 시민적 근대사학의 확립자 △ 대도활부적(大斧活斧的) 평론가 △ 투쟁 속에 살다간 민족주이자 △독립투쟁의 대명사, 그리고 위대한 혁명가 △ 조선민족의 국보적 자랑, 세계학단의 경이적 존재 등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