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물(多勿)’은 순수한 우리말 ‘따물’에서 온 말이다. 땅을 ‘다 물려 받는다’는 말이다. 고구려의 국시(國是)가 바로 ‘따물’이다. 옛 조선의 땅과 정신을 다 물려 받는 나라가 되겠다는 각오로 일관한다.

당시의 기록에는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불렀다. 궁예는 나라를 세워 스스로 ‘후 고구려’의 개국 왕이 되었으나 점차 포악해져갔다. 결국 부하들에 의하여 쫓겨난 후, 백성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왕건(王建, 서기877년~ 943년)은 아버지 금성태수 ‘융’과 어머니 ‘한 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궁예 휘하의 유능하고 덕망 높은 장군이었던 그가 서기 936년 결국 후삼국의 난세를 다잡아 ‘고려’를 건국하니 바로 고구려를 ‘다물’하겠다는 의지이다. 황제 국을 상징하는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개경(現 개성)을 수도로 삼아 비로소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였다.

▲ 고려의 태조 왕건 (원암 장영주 作)

전장 터의 명장인 고려 태조 왕건은 국정에 임하여서는 후덕한 인품과 중용, 덕치를 바탕으로 마침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게 된다. 자신만을 내세우는 난세에서도 남을 돌아볼 줄 알았다. 끝없는 전쟁 속에서 조화력을 발휘하여 무력보다 관용과 타협으로 사람들을 자기 수중으로 끌어들였다. 지방 토호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혼인정책으로 전쟁 없이 평화롭게 하나가 되니 부인이 29명이 되었다.

태조 왕건은 나라를 세우되 중국을 무작정 따르려 하지 않았다.

"생각 컨데 우리 동방이 예로부터 당풍(唐風)을 사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법을 따랐다. 그러나 방위가 다르고 풍토가 달라 사람 성품이 제각기 다르니 진실로 반드시 동화되어서는 안 되리라."

옛 조선과 고구려를 ‘다물’하려는 풍모가 완연하다. 그러기에 고려는 세계 최강의 몽골에 맞서서도 결코 항복을 하려 하지 않았다. 건국 태조 왕건의 뜻이 고려인의 DNA로 망실되지 않고 살아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를 쓰러뜨린 이성계의 근세조선은 출발부터 명나라를 사대하며 스스로 속국이 되어 ‘제 정신’을 내주었다.

태조 왕건이 후손들에게 귀감으로 삼게 한 유훈인 훈요십조(訓要十條)에는 ‘불법을 승상하라’, ‘서경(평양)을 중시하라’와 ‘연등과 팔관회(八關會)같은 중요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 등이 있다. ‘팔관회’는 바로 옛 조선과 고구려 발해로 이어져 오던 한민족의 국학인 선도(仙道)’를 기리는 국가적인 행사였다.

67세에 이르러 태조 왕건은 병을 얻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나는 죽는 일을 집에 돌아가는 일처럼 여기고 있다. 슬퍼할 것 없다”라고 했다. 마침내 운명을 맞아 신하들이 크게 울부짖자, 잠시 정신이 든 왕건은 “생명이 덧없음을 모르느냐?”라고 꾸짖고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약 40년 뒤,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태조 왕건에 대해 평한다.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하기를 좋아했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켰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었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았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았다……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았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왔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었다.”

초창기 고려는 왕권에 비해 지방 토호 세력이 강력했지만 4대 광종에 이르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과 교류하였고 아라비아와 페르시아까지 무역을 하였다.

고려는 31대 공민왕이 즉위하여 왕권을 다시 세우고 국력을 강화시키고자 했지만 실패로 끝나버렸다. 그러자 권력의 중심인 왕권은 무너지고 민심이 급격하게 떠나 버렸다. 475년간 존속하던 고려는 변방의 무장 이성계와 그의 책사 정도전 등에 의하여 멸망한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