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B.C.69년~A.D.4년)는 신라의 개국시조로서 47년간 재위(B.C.57년~A.D.4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파소(婆蘇)다.

옛 부여 재실(왕궁)의 여자 ‘파소’가 남편 없이 처녀 잉태하여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 흑룡강성에 인접한 송화강의 지류)로부터 동옥저에 이르러 또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내을촌에 이르렀다.

당시 한반도 남쪽에는 많은 작은 나라가 분포하고 있었다. B.C.238년, 47대 2,096년을 존속하던 옛 조선의 멸망과 잇따른 북방의 정치적 격변에 따른 유민, 이민의 파동 때문이다.

▲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의 이동로(여러 가지 설 중 하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는 급량·모량·사량·본피·한지·습비 등 6족의 후예들이 이미 사로국(斯盧國)을 형성하여 양산촌·고허촌·진지촌·대수촌·가리촌·고야촌 등 6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고허촌장인 ‘소벌도리(蘇伐都利, 경주 최씨의 시조가 됨)’가 자신들의 고향인 옛 조선의 땅, 부여에서 ‘파소’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를 집에다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여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서간’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이처럼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부여 황실의 딸이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신라가 현재 만주의 부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준다.

박혁거세는 즉위와 동시에 사량촌 출신의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박혁거세의 왕 이름은 ‘거서간’이며 일명 ‘불구내’이다. 당시의 글이 한자의 음과 뜻이 섞여 이두문자로 남아 있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추출할 수는 없지만 엇비슷하게 짐작할 수는 있다.

박처럼 둥근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박(朴)’이라는 성이 붙었다. 또는 ‘박’은 ‘밝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혁거세’는 이름이 아닌 높여 부르는 존호이다. '혁'은 뜻으로 읽고, '거'는 음으로 읽은 '불구'와, '세'를 뜻으로 읽은 '내'를 합한 것으로 '뉘(누리)', 즉 '밝은 세상'이 된다. 또는 간단하게 ‘밝은 사내’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 박혁거세의 모습 (원암 장영주 作)

B.C.41년부터 박혁거세가 알영부인을 동반, 6부를 순행하면서 백성에게 농업·양잠을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쓰니, 백성들이 이들을 이성(二聖)이라 칭송한다. B.C.37년 서울을 금성으로 하고, B.C.32년 그곳에 궁궐을 지었다. 죽은 뒤 ‘담암사’ 북쪽에 있는 사릉에 장사지냈다.

왕 이름 거서간(거(커), 서(서쪽, 서 있는), 간(칸, 가한))은 ‘서쪽을 경계하는 우두머리’ 또는 소박하게 ‘크게 서 있는 칸(왕)’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신라는 ‘서라벌’로 ‘새로운 땅, 벌판’이다. 그러므로 ‘박혁거세’는 ‘밝고 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벌판에 우뚝 서 있는 왕’이란 뜻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요컨대 박혁거세는 ‘온 누리를 밝은 세상으로 만들 지도자‘라는 뜻이다. 건국 지도자의 이 뜻은 온전히 후대로 흘렀기에 삼국 중 가장 늦게 출발하고 동쪽의 궁벽한 변방인 신라가 결국 삼국통일을 하고 천 년을 이어가는 동력의 큰 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빛의 도시 경주’는 실크로드의 종착지로 이제 그 빛과 에너지를 시발지인 중동으로 거슬러 전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은 ‘서라벌’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천 년 신라의 정신이 지구촌 시대에 세상을 빛 낼 ‘홍익의 나라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 머물며 역동적으로 숨 쉬고 있다.

우리 모두 밝은 세상을 만드는 ‘박혁거세’로 밝고 새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