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으로 통일신라와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남북국시대를 전개한다. 전성기 때의 영토는 총연장 4,300km, 사방 5천 리에 달하여 고구려보다 두 배 이상 넓은 영토를 가진 대제국으로 수도만 다섯 군데를 설치하였다.

발해는 당나라와 일본, 신라와 왕성한 교역을 하여 동쪽의 번성한 나라 ‘해동성국’이 되었다. 길을 가는 나그네는 융숭하게 대접하고 거저 재워주며, 발해인 3명이면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이 전해 온다. 황제의 나라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연호를 써서 당나라의 변방 속국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 발해의 태조 대조영 (원암 장영주 作)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가 패망한 지 꼭 30년 만인 698년, 발해가 건국된다. 고구려의 옛 땅과 문물을 다물(多勿)하기 위하여 발해를 건국한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이 나섰다. 여기에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大仲象), 아우 대야발, 문적원감 임아상 등 지도자들과 백성들, 일부 편입된 말갈족이 함께 생사를 초월한 공로가 아닐 수 없다.

대조영과 대중상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의 동북쪽 땅을 굳게 지키니, 고구려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들었다. 현재 중국의 서북지방, 즉 요동은 옛 조선 이전의 신시배달국 치우천황이 활동했던 동이족의 무대였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단군전비를 직접 본 것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진국’이라고도 부르니 ‘신인(神人)’이 대조영의 꿈에 나타나 금부(金符, 금척)를 주면서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 진역(동쪽)을 다스리라”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건원(연호)을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대조영 자신이 지극 정성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중국과 대등한 황제 국임을 자인하고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서에는 발해, 곧 대진국은 지금까지 중국의 변방부족국가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이는 중국 사학자들의 천박하게 왜곡한 표현을 그대로 베껴 쓴 모화사상에 기인한다. 예로부터 중국 역사학자들은 중화사상에 물들어 자신들 이외의 나라나 부족은 모두 오랑캐로 묘사하면서 그 성이나 이름, 장소조차 경멸스럽게 바꾸어 놓기 일쑤였다.

세계를 제패한 어엿한 대국인 ‘몽골‘을 ’몽고(蒙古)’로 표기하며 ‘예로부터 꿈이나 꾸는 몽매한 부족‘이란 다른 뜻을 숨겨놓았다.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고추모’ 대왕도 한자로 굳이 ‘주몽(朱蒙)‘이라고 쓰니 같은 의도이다. 또,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 태종을 죽게 한 고구려의 걸출한 지도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천개소문(賤蓋蘇文)‘이라고 기록하니 성을 천할 ’천(賤)’자로 바꾼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대중상, 대조영을 도와 당나라에 항거한 거란족장 ’이진충‘과 그의 처남 ’손만영‘은 ’이진멸‘과 ’손만참‘으로 이름을 바꾸어 기록한다. 그들의 후손까지 다 멸절하고 베어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의 ‘구당서’와 ‘신당서’는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 대중상을 말갈인의 성인 걸(乞)씨를 붙이니 어김없이 ‘구걸한다’는 뜻이다. 특히 대중상은 ‘걸’ 자를 중복하여 써서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고 폄하한다.

그야말로 역사를 구걸하듯 왜곡하는 천박한 중국 사학자들과 지도자들의 의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비틀어진 역사의식은 지금까지 중국정부의 서남공정, 서북공정, 동북공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 때 일본 왕이 은밀하게 ‘함께 신라를 치자’는 제의를 해오지만 발해는 같은 동족을 공격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발해만이 영토의 일부이므로 ’발해‘라고 불려 왔으나 우리 가슴속에는 영원히 ’밝은 해의 나라‘로 존재하고 있다.

나라를 세우자 대조영은 그의 아우 ’대야발‘에게 명하여 소실되어버린 고구려의 역사서를 복원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반안군왕 대야발‘은 명을 받들어 13년에 걸쳐 두 번이나 ’돌궐(터키의 전신)‘까지 오가며 고구려와 그 이전의 역사와 ’삼일신고‘를 비롯한 한민족의 철학서를 복원한다. 이에 대조영은 친히 ’삼일신고 어제찬‘을 지어 비할 바 없는 기쁨을 길이 후대에 전한다.

대조영의 아들 2세 황제 대무예(무황제)와 손자인 3세 황제 대흠무(문황제)는 정성을 다하여 한민족의 정신을 이어 받는다. 마침내 서기 737년(단기 3070년, 개천 4634년)의 역사에 다음처럼 기록 된다.

“태자 흠무가 즉위하였다. 연호를 대흥이라 고치고, 도읍을 동경 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옮기셨다. 이듬해 태학을 세우고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한단고사의 옛 역사를 강론하시고, 또 학자들에게 국사 125권을 편찬하도록 명하셨다.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시고, 무위는 여러 주변 족속을 복종시켰다. 이에 동방의 현묘지도가 백성들에게 흠뻑 젖어 들고 홍익인간의 교화는 만방에 미쳤다.”

이처럼 우리의 선조들은 모든 것을 바쳐서 진리로써 나라를 건국하고, 진리로써 가르치고, 진리로써 이어왔다. 바로 지금의 국학(國學)이다. 거룩하고 거룩할 뿐이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