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개천의 달, 천손 한민족의 하늘이 열린 날에 홍익인간의 꿈이 실현되어야 한다. 하늘이 크게 열리는 개천(開天)은 人中天地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안의 하늘이 열리면 인성과 영성, 신성이 밝아지고, 그때 우리는 인간의 가치와 자연의 가치, 뇌의 가치를 알게 된다. 개천의 밝은 마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 나갈 때 우리는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홍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국조 단군왕검께서 알려 주신 홍익의 가치를 만나는 순간 진정한 개천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내 안의 하늘이 열리고 본성의 빛을 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국조 단군의 꿈이었으며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한국인의 홍익 DNA 속에 남아있다. 전 인류가 겪고 있는 유래없는 팬데믹 상황,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가 선택해야 될 시대 정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홍익정신에 있다. 이러한 홍익정신은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들어 주는 한국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한국문화의 원형은 단군문화다. 단군문화는 우리 역사의 뿌리, 단군에서 비롯되었다.

단군, 우리 역사와 문화의 뿌리

민족의 위기 때마다 단군은 우리의 구심이었으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 위기 속에서 더 빛나는 민족의 얼, 화합하고 단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 주었으며,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던 홍익의 DNA도 한 몫 해왔다. 이러한 홍익의 유전자를 심어준 단군은 우리 역사와 문화의 뿌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잘 모르고 있다. 남은 잘 아는데 자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문화를 알아야 할 것이다. 문화는 역사적 소산이다. 역사가 짧으면 그 문화도 짧고 적다. 우리는 5천 년 역사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도 실상은 2천 년 역사와 그 문화밖에 내보이지 못하고 있다. 한국문화 3천 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그 동안 많은 학자가 잃어버린 단군조선 2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찾고자 하였다. 외롭고도 힘들었던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들의 결과로 역사 교과서에도 단군과 단군조선을 역사로 인식하게 이르렀다.

단군문화는 한국문화의 원형이다

“조선의 시조는 단군이시니 단군은 신이 아니요. 인간이시라.” 위당 정인보 선생이 그의 『조선사연구』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그는 "단군은 백두산과 송화강을 터전으로 잡고 조선을 만드셨으니 조선 민족의 여러 갈래는 단군으로부터 생기고 조선의 정치와 문화는 모두 단군으로부터 열리었다. 그러니 우리 선조 가운데 우리 민족에 끼친 흔적과 그림자가 있다면 모두 단군의 뛰어나심을 받들어 이룩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 역사와 문화의 시작은 단군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인에게는 당연한 상식이었다. 따라서 한국문화의 원형은 단군문화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에는 어린 학동들이 서당에서 이미 단군이 우리의 시조란 사실을 배워서 익히 알고 있었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익히고 나면 『동몽선습』을 통해 우리 역사의 뿌리가 단군에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동방에 처음에는 임금이 없더니 신인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이를 임금으로 세웠다. 그래서 중국의 요임금과 병립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하니 이가 곧 단군이다."

우리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과 우리 민족이 개간한 땅인 간도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은 천산(天山)ㆍ성악(聖岳)으로 신앙의 대상이었고, 제도(帝都)ㆍ신읍 (神邑)으로 역사의 출발점이었으며, 오천 년 역사 속에서 신시(神市)를 비롯해서 단군, 부여, 고구려, 말갈, 발해, 금, 여진, 만주로 이어지는 열 손가락이 넘는 왕조가 모두 백두산의 품 안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지인 것이다. 백두산 아래 조선족이 사는 동네는 연길이다. 일제의 토지 약탈 정책으로 땅을 잃은 농민들이 떠나갔던 북간도가 지금의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이며, 그 행정 중심지가 연길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이 흐르는데 북간도는 두만강 북쪽 땅이고, 서간도는 압록강 건너 땅이었다.

우리 민족이 이 땅을 개간했다라는 의미로 간도(墾島)란 이름이 붙었는데 일제가 사이間의 간도(間島)로 바꿨다고 한다. 이 북간도 땅에서 얼마나 많은 우리 조상들이 독립 운동을 하다가 혹은 조국을 그리워하다가 돌아가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천제의 전통은 민족의 종산으로 이어지다

백두산은 여섯 강의 수원지가 되는데 여섯 강 중 하나가 송화강이다. 우리 민족은 만주 땅에 나라를 세워 송화강의 은혜를 입고 살아온 민족이기 때문에 뒷날 남으로 내려온 뒤에도 백두산의 은혜를 잊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이 뻗어 내리는 산골짝을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되었으니 백두산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백두산 정상에서 해마다 천제를 올려 천신의 은혜에 보답해 왔다. 천제의 이름은 곳에 따라 달랐으나 한결같이 제천 행사였다. 영고, 동맹, 무천, 국중대회 등이 그것이었다. 그 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천제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사실 백두산이란 이름부터 천제와 관련되어 있다. 백두산에서 제사를 올릴 때는 반드시 흰 소머리를 제물로 바쳤다. 백두산은 또 민족의 우두머리 산이다. 우두머리산이란 최고(最高)의 산이요, 가장 거룩한 성산이란 뜻이다. 곧 천산(天山)이란 말이다.

한 민족의 조상이 묻힌 산을 종산(宗山)이라 한다. 우리 민족 최고의 종산은 백두산이다. 민족의 종산 중 금강산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으나 금강산을 단지 구경만 하러 가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하면 금강산 역시 우리 민족에게 예사로운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산 정상을 비로봉이라고 하는데 비로봉이란 바로 천신제를 드렸던 봉우리란 뜻이다. 지리산의 천왕봉 역시 천제를 올리던 봉우리였다.

금강산이란 이름은 불교 신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 이전의 이름은 상악산(霜嶽山)이었다. 북쪽에 상악산이 있고 바로 그 남쪽에 설악산(雪嶽山)이 있다. 이 두 산은 서로 이어진 연산(連山)인데 남북분단의 상황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갈린 것이다. 두 산은 모두 단군의 산, 즉 민족의 종산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비단 백두산이나 금강산과 같은 종산만 경배하였던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야산이라 하더라도 어렵게 알아 함부로 산에서 나무하는 것을 삼갔다. 소나무의 경우는 특히 소중하게 다루었다. 소나무란 신성한 나무, 소도의 나무란 뜻이다. 이처럼 산은 한국인에게 있어 거룩하고 신성한 성역이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산을 소중하게 생각한 이유 중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마을마다 진산(鎭山)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산에는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주는 산신이 살아 계시는 것으로 믿었다. 강화도의 진산은 고려산, 광주의 진산은 무등산, 서울의 진산은 북한산인데, 북한산은 동시에 한국의 진산이기도 하였다. 진산은 또 그 마을을 지켜주는 산성이기도 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과 달라서 산에 가는 것을 등산이라 하여 일종의 스포츠로 알고 있다. 그런 생각으로 산을 오르면 산의 존엄성을 알지 못하고 산을 우습게 보기 쉽다. 옛날 사람들은 산을 두려워했고, 산을 경외(敬畏)하였다. 그들은 산에 올라간다고 하지 않고 ‘산에 들어간다(入山)’고 하거나 ‘산길을 간다(山行)’고 했다. 그래서 산에는 심신을 단련하거나 천제를 올리기 위해 갔던 것이다. 외침으로 인한 국난이나 가뭄으로 인한 한재를 만날 때면 어김없이 천제를 올리기 위하여 금강산이나 백두산 그리고 묘향산 같은 큰 산에 입산을 했다.

산신각과 신단수는 민족의 얼이고 문화이다

우리 나라는 불교가 들어온 뒤에 절마다 산신각을 지어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산신각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는데 반드시 소나무 아래 정좌하신 산신령이 있고 그 옆에 호랑이가 지키고 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불사, 향교, 교회가 공존하고 있다. 불사를 절이라고 하는데 절이란 말은 순수 우리말로 절에 들어가면 반드시 허리를 굽혀 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을마다 서 있던 신단수를 우리는 당나무라고 불렀다. 신단수 옆에 당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나이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나갈 때 소원 성취를 빌었던 나무가 신단수였고, 아낙네가 단군 같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던 나무가 신단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얼이었고 문화였다.

신성한 산을 백산 또는 백악이라고 한다

태백산(太白山)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도계에 있는 남한의 태백산을 가리킨다. 이 태백산은 신라 5악의 하나로 중시되었으니 이미 삼국시대부터 신성시된 백산이었다. 해발 1,564미터의 태백산 정상을 망경대라 부르며 거기에 참성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름하여 천황단(天皇壇)이라 한다. 천황단의 천황이란 바로 환웅천황을 말한다. 태백산 말고도 천황봉이 많다. 지리산 천황봉이나 계룡산 천황봉이 그것이다. 모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이란 뜻이다. 태백산에 오르려면 소도동이란 곳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태백시의 소도는 한자로 所道라고 되어 있으나 한자 표기와는 상관없이 소도(蘇塗)와 음이 같다.

소도는 솟대에서 비롯되었고, 솟대를 세운 곳은 아무도 범할 수 없는 신성한 곳이었다. 신성한 산을 백산 또는 백악이라고 하고, 이것이 변하여 서울에서 처럼 북악이라고도 하였다.

소도동에서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골짜기를 당골(堂谷)이라 한다. 단군골이라는 뜻이다. 국가민속문화재인 천제단은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황단(천왕단)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장군단과 남쪽 아래에 있는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또배기, 서낭당(성황당)은 단군민족의 고유한 문화이다

강원도 지역에 남아있는 단군 문화에는 진또배기라고 있다. 진또배기의 진또(津渡)는 ‘나루’란 뜻이고, 배기는 ‘박이’란 뜻이다. 즉 ‘바다에 떠내려 온 솟대를 나루터에 박았다.’는 말이 진또배기의 어원이다. 진또배기는 바로 솟대(소도)이고, 나루를 지켜주는 신대이다. 돌로 쌓건 나무로 세우건 솟대는 하늘나라로 통하는 신목이다. 그래서 신대 위에 앉은 새는 신조이다. 일본 신사의 대문을 도리이(鳥居)라고 하는데 실제 새는 없다. 그러면서 새가 있다는 이름이 붙은 것은 원래 그 대문 위에 새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신사의 대문은 한국에서 건너간 솟대이다.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신 신당을 서낭당(성황당)이라고 하는데 그 곁에는 보통 신목으로 신성시 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였다.

『삼국유사』에 보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신단수 아래 내려오시니 젊고 아리따운 웅녀가 단수에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웅녀의 소원을 들어 아기를 갖게 하니, 이가 곧 단군이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민족의 시조 이야기가 서낭당과 진또배기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서낭당의 제사 유래는 단신제(檀神祭)이다. 단신제를 지내던 터는 지금도 만주 땅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그 곳 사람들 전설에 따르면 태고 때 단신제를 지내던 터라고 한다. 이러한 단신제는 고구려와 발해, 요, 금을 거쳐 줄곧 그 전통을 이어 왔다. 서낭제는 바로 단신제의 유풍이며, 그것이 바로 단군 민족의 고유 문화인 것이다.

다시 돌아 온 개천의 달, 뿌리가 있는 문화민족의 일원으로 거듭나다

역사는 문화를 낳고 문화는 철학과 사상, 즉 고유한 사유체계를 형성한다. 고유한 사유체계는 다시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오래된 역사는 역사의 깊이를 말해주고, 천부경과 같은 경전의 존재는 문화 민족임을 말해주며, 국조 단군의 존재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밝혀주는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이 말 안 듣고 사고치면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마을 어른들에게 예절없이 행동하면 "뉘집 자식인고?"라고 물었던 그 이면에는 뿌리에 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뿌리가 있는 민족의 일원이다. 그 뿌리는 모두 단군에서 비롯 되었다. 다시 돌아 온 개천의 달, 우리는 뿌리가 있는 문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그 뿌리를 소중히 하고 잘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