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빛나는 조연을 찾아서
우리 역사의 빛나는 조연을 찾아서
  • 민성욱 박사
  • k-spirit@naver.com
  • 승인 2021.06.0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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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성욱 박사

지난 4월에 우리나라 영화계에는 큰 경사가 있었다. 영화 ‘미나리’에서 ‘순자’역을 맡은 배우 윤여정 씨가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수상 후 윤여정 씨의 주가는 상종가다. 영화배우 브랜드 평판 1위를 차지하는 등 오스카상 수상 효과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윤여정 씨를 보면서 주연보다 조연이 더 빛날 수도 있구나 하는 사고 전환을 하게 되었다. 역사도 한 편의 영화라면 주연과 조연이 있을 것이다. 그 동안은 주연만 주목을 받아 왔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우리 역사에도 빛나는 조연들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에도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다. 한 영화에서도 주연과 조연 모두 그 역할을 다 할 때 그 영화의 완성도가 향상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사도 중심 역사뿐만 아니라 주변 역사들까지도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배제하거나 제외한 역사들

광복이후 우리 역사학계는 국사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체계적인 서술을 위하여 역사를 재단하였다. 역설적이지만 우리 역사를 체계화할수록 배제하거나 제외한 역사들이 존재하였다. 즉 동일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갖고 있어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되지 못한 고대인들의 역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결국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주변국에 통합되어 지배받게 되지만, 각각의 고유한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었다. 대표적인 나라로 옥저, 동예, 부여, 읍루 등이 있었다. 부여인, 옥저인, 동예인, 읍루인 등의 시간적 배경은 3세기 무렵이며, 공간적 배경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이다.

고조선이 분열되어 동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국, 대방국, 한(삼한), 신라, 백제, 가야 등의 여러 나라가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를 열국시대라고 한다. 여기서 열국이란 열 개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벌릴 렬(列)자를 써서 여러 나라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열국들은 국력을 키워 하나였던 시절을 기억하며 통일전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남은 나라가 고구려, 백제, 신라, 즉 삼국이어서 삼국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열국 가운데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나라들의 멸망 연대를 보면 신라는 935년, 고구려는 668년, 백제는 660년, 가야는 562년, 동부여는 494년, 최씨낙랑국과 대방국은 300년, 동예는 245년 이전, 동옥저는 56년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백제, 신라로만 남아있었던 삼국시대는 가야가 멸망한 562년부터 백제가 멸망한 660년까지 98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한국고대사를 삼국시대로 규정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옥저는 한국고대사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북방민족

먼저 옥저다. 옥저는 기원전 4~3세기경부터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정착하면서 동해안을 따라 연해주로 이어지는 환동해 지역에 살았던 집단이다. 옥저의 북쪽에 있던 집단인 읍루는 더욱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다. 읍루인들은 옥저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 내려와서 자연스럽게 섞여 살았고, 나중에 고구려와 백산말갈을 형성하였다. 한국고대사에서 한 축을 담당한 북방민족인 옥저와 읍루를 고고학 자료를 통해 과거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밝히고, 알려지지 않은 북방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옥저는 부여족의 한 갈래로 예맥족이 조상이다. 이들이 살고 있던 곳은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평야 일대로 안변 지방이 그 중심지였다. 국경과 마주한 나라는 북쪽에 읍루와 부여, 서쪽에 고구려, 남쪽에 동예가 있었다. 원래 옥저는 한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낙랑군의 세력이 약해져서 자치적인 소국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옥저와 읍루는 ‘환동해 문화권’이라고 알려진 러시아 아무르강 하류 유역부터 연해주를 거쳐 한반도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살았다. 두만강 건너편 평야지대에서는 발해 유적이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하지만 조사 결과 2000년 전의 옥저 사람들이 온돌집을 짓고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유적이 드러났다. 옥저인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풍수인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철제 농기구를 통해 농사를 지으며 고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원거리 교역을 했다.

한편 두만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였던 북옥저는 동옥저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그 습속은 같았다. 읍루와 접경하고 있어 읍루족의 노략질에 시달렸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 뒤 285년 부여가 선비족 모용씨의 침공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자살하는 등 큰 타격을 입자, 부여국 왕실을 비롯한 그 중심세력이 옥저로 피난함으로써 큰 변화를 보였다. 곧 이어 부여왕실은 진(晉)나라의 지원을 받아 고국을 찾아 돌아갔고, 이때 부여국의 일부 세력이 옥저에 계속 잔류하여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동부여’ 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 뒤 이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고, 고구려는 이곳에 책성(柵城)을 설치하였다. 책성은 고구려 동부지방의 중심이 되는 주요한 성(城)이었다. 따라서 북옥저는 동옥저와 마찬가지로 성을 단위로 하는 고구려의 지방제도 하에 편제되었고, 옥저인은 고구려의 지방민으로 귀속되었다.

읍루인은 독특한 지리환경에서 문화를 발달시킨 사람들

다음은 읍루다. 읍루는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산속에 요새처럼 마을을 만들고 살았다. 옥저와 교역하거나 때로는 충돌하기도 했다. 산속에서는 모피동물을 사냥하고 양과 염소를 목축했지만, 평지에서는 잡곡 농사를 지었다. 이들은 어느 지역에나 적응할 능력이 있었으므로 북방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본 옥저와 읍루는 결코 변방의 작은 오랑캐 집단이 아니다. 이들은 동해안의 독특한 지리환경에서 문화를 발달시킨 사람들이고 문화적 저력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북방지역 연구를 통해 한반도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던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조명해야 될 것이다.

봉림고성의 유적은 읍루인이 주인공일까

중국 흑룡강성 쌍압산시 우의현 성부향 봉림촌에서 발굴된 유적인 봉림고성이 있다. 중국에서는 봉림고성을 읍루의 왕성으로 보고, 우의현에 ‘읍루문화단지’를 조성해 놓았다. 봉림고성과 포태산 칠성제단은 칠성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한민족의 창세 종교는 삼신과 칠성 신앙이다. 우리나라는 칠성신앙의 본고장으로 산하의 바위에는 칠성 성혈 등이 많이 발견된다. 포태산 칠성제단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이래 섬겨온 칠상신앙의 그 증거를 잘 보여 준다. 포태산 유적은 타원형으로 되어있고, 그 정상에 칠성제단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중국에서 처음 발견된 북두칠성 제단 유적이다. 포태산 유적은 상, 중, 하의 세 겹의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인공적으로 다듬어 놓은 것이다. 구덩이 8곳 중 7곳은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고 나머지 1곳은 북극성의 위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천갱(天坑), 곧 별자리를 표시하는 구덩이는 그 지름이 6~8미터, 깊이는 0.5미터이다. 장방형의 둥근 모서리는 고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고 한다. 이러한 칠성제단의 유적은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지에서 발견한 원형 형태의 제단과 유사하다. 우하량 유적지의 원형 제단도 3단 형태의 타원인데, 각도가 동남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15도 기울어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양이 황도를 따라 15도 움직일 때마다 절기를 만들어 일 년이면 총 24개의 절기가 된다. 황도는 태양이 1년간 움직이는 길이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와 각도에 따라 계절이 바뀌고 기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제단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천문관측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동예의 정체성은 고구려에 복속된 후에도 유지

이번에는 동예다. 동예는 예가 동쪽으로 옮겨 왔다고 해서 동예라고 부른다. 동예는 부족 집단 사회이었기에 고구려의 단결력을 따라갈 수 없었고, 고구려의 조공국 중 하나였다가 고구려에 동화되었다. 동예의 멸망설 중 하나인 고구려 복속설은 고구려가 옥저를 멸망시킨 후 비슷한 위치였던 동예도 복속시켰다는 설과 동예가 원래 연맹 왕국이었기에, 내부 분열이나 혼란으로 멸망했다는 것이다. 이 두 설 중 하나이든, 아님 기타 설이든, 동예 잔존 세력은 고구려에게 결국 복속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와 별개로 동예의 정체성은 계속 유지되었는지, 한참 후인 548년 독성산성 전투에서 동예인 6천명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동예는 지금 함경남도 남쪽 일부에서 강원도 북쪽 일부에 자리 잡고 있던 나라로 추정되며 남쪽에 진한, 북쪽에 고구려와 옥저와 이웃하였으며 인구는 약 2만호였으며 지도자 중심 국가의 틀을 못 갖추고 하나의 부족연맹에 그쳤다. 동예는 기원전 2세기경에 한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백여 년이 지난 1세기 후반에 한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세워진 국가이며 고구려 제5대 태조왕 때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읍군 등이 동예를 다스렸으며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이때는 부여의 영고처럼 사람들이 술과 노래를 즐겼으며 범 토템을 갖고 있었다. 동예는 제19대 고구려 광개토태왕 때 완전히 병합되었다.

옥저인이 만든 온돌

옥저 및 동예는 통일된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고, 부족 연맹 수준에 머물러 있다가 끝내는 고구려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더구나 그들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때문에 옥저의 시대로부터 거의 2000년이 지난 지금, 옥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옥저인들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옥저인이 만든 온돌은 그 이후의 고구려와 발해인들도 즐겨 사용했으며,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에 깊숙이 남아 있다. 이것만으로도 옥저인들은 우리 역사와 문화에 큰 흔적을 남긴 셈이다. 함경도 지방에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왔고, 특히 옥저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고대 부족국가로 우리 역사에 확실한 이름을 새겼다.

부여사에서는 부여가 주인공

한편 부여의 경우는 옥저나 동예와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우선 고구려 계통의 사료에서 그들의 흔적을 일부 찾을 수 있다. 부여는 일찍이 예맥족의 조종적(祖宗的) 위치에 있었던 나라로 평가받았다. 다만, 한국고대사에서 부여사 서술은 주로 고구려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온전히 부여를 주인공으로 하는 체계적인 역사 서술이 있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흔히 부여는 고구려 건국세력의 발원지로서 혹은 고구려 성장과정에서의 극복 대상으로 서술되었다.

우리 역사 속 빛나는 조연을 찾아서

이렇듯 부여와 옥저 및 동예 등은 고대 부족연맹국가에 그쳤지만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국가들이다. 비록 삼국시대를 향한 통합과정이라는 역사 서술 체계 안에서 그들은 고구려라는 주연에 가려진 채 조연으로 남게 되었고, 한국사 전개라는 구조 속에서 주변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나름의 독자적인 역사와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었던 그들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흔한 배역을 흔하지 않은 연기로 찬사를 받았던 배우 윤여정 씨처럼 우리 역사 속 빛나는 조연을 찾아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다.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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