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 복원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국학의 눈으로 바라본 가야사
가야사 복원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국학의 눈으로 바라본 가야사
  • 민성욱 박사
  • k-spirit@naver.com
  • 승인 2021.09.1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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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성욱 박사

최근 남원과 합천에서 해당 지역의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원은 ‘기문국’, 합천은 ‘다라국’으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나라 이름으로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하여 지역주민 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국민이 들고 일어났다. 심지어 이것에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왔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가야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라면 우리 역사는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에 의해 한반도 남부지역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에 의해 한반도 중·북부지역은 중국의 식민지인 것이 된다. 그 역사 시작부터 식민지 역사로 귀결되고 만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임나일본부를 근거로 정한론에 따른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고, 중국은 북한의 체제 붕괴를 대비 군대를 북한과의 국경지대에 집결시키고 있다. 우리는 ‘역사는 안보’ 라는 말이 실감나는 역사적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사실 한물 갔고, 케케묵은 논쟁이며, 한ㆍ일 사학자 간에 이미 폐기되었다고 했던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볼 일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도가 있는 역사왜곡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 계속 이어지고 방심하면 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가야사 복원사업으로 다시 살아난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이 다시 등장한 것은 공교롭게도 현 정부의 국정과제이자 대통령 공약사업이기도 한 가야사 복원사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가야사 복원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대개 가야사가 경남을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치는 역사로 알려져 있었지만, 광양만, 순천만,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ㆍ유물이 남아있는 아주 넓었던 역사라는 새로운 인식에서 출발하였으며, 영ㆍ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고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삼국의 역사에 치우쳐져 있었다. 기록상으로 보면 삼국만 존재했던 기간은 불과 100년도 채 안 된다. 결국 고대국가 중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삼국이 우리 고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한국사에서 주변으로 인식되어 왔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 역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고 더 이상의 왜곡은 없어질 것이며, 우리 미래 또한 밝아질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늦었지만 가야사 복원 사업은 반길 일인 것이다. 하지만 뭐든지 그렇지만 제대로 해야지 그 출발부터 그릇된 인식 하에 시작한 역사 복원사업은 결국 우리 역사발전에 해악만 끼칠 것이다.

컴퓨터 용어 중에 GIGO(Garbage In Garbage Out) 라고 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릇된 역사인식에서 출발한 역사복원사업은 쓰레기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인류사적으로도 큰 과오를 남기는 것이다.

가야사 복원사업의 필요성

우리나라 국민의 3분의 1은 가야의 후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 김해김씨의 인구가 가장 많고 김해허씨, 인천이씨 등 파생된 성씨까지 다 합치면 길거리에서 만나는 3명 중 1명은 가야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야사 복원사업은 대한민국 국민 중 3분의 1에 해당 하는 인구의 그 뿌리를 제대로 찾아주는 사업이다. 그 만큼 중요하고 따라서 국민적 합의가 뒤따라야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합의 과정 없이 기존 사학계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인 식민주의사관에 입각한 복원은 이미 복원의 목적을 상실케 한다. 가야사 복원사업을 위해 현재 책정된 예산만 해도 1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막대한 국민의 혈세가 들어가는 것만큼 그 동안 주변으로 인식되어 왔던 가야사를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되고, 가야사에 대한 일본의 역사왜곡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 충분한 논의를 통해 제대로 된 가야사 복원 사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가야 문화권 지자체의 움직임

가야사 복원과 관련해서는 경상남도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국정과제 반영을 건의한 가야 문화권 개발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 6개 핵심 사업을 선정하고, 체계적 추진을 위해 전담부서 신설도 검토하고 있다. 또한 경상남도는 국가 지정 가야유적 42곳 중 29곳이 도내에 있어 가야사 복원사업이 경남을 중심으로 추진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남원시도 가야사 복원과 관련해 적극적인 행보에 나서고 있다. 정부정책에 발맞춰 운봉가야를 체계적으로 발굴해 잃어버린 운봉가야 왕국을 국가사적으로 복원 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추가적으로 올해 신규 사업으로 ‘철의 왕국 기문국이 깨어나다’라는 슬로건 아래 남원가야 세계유산 등재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역사분쟁의 소지가 있는 역사는 역사의식이 중요하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과 엮여있어 역사분쟁의 소지가 있는 역사는 정말 신중하게 접근해야 된다. 막대한 국가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이 결국 일본의 역사왜곡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힘을 실어준다면 이것은 안 될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없었거나 해당 지자체 모든 구성원들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없다면 그것은 안하는 만 못할 것이다. 누구를 위한 역사복원 사업이고, 또 누구를 위한 세계유산등재사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고 충분한 연구와 그 결과가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 농익지 않다 보니 곳곳에서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고 있고, 심지어 세계유산 등재사업 자체를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진행 중인 것이다. 국가가 되었든 지자체가 되었든 최고 리더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자질이 역사의식이다. 리더의 역사의식이 흐릿하거나 잘못되었다면 그 조직은 발전은커녕 퇴보하기 마련이다. 해당 지자체 주민들은 가야사가 임나일본부설로 부활하고 있다면서 가야 유적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것에는 적극 찬성하지만, 『일본서기』를 인용하여 임나일본부설을 부활시키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남원과 합천의 임나국 등재가 완료되면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아이들은 『일본서기』 임나사를 가야사로 배우는 역사의 과오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

천황중심사관으로 만든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의 한계

『일본서기』는 720년 야마토(大和) 倭가 천황중심사관으로 만든 일본 역사서이다. 『일본서기』는 신뢰성에 문제가 많은 사료이다. 일본 학자들조차 『일본서기』에서 실제 역사는 6세기 이후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4세기 말, 큐슈 지역도 지배하지 못하던 야마토 왜가 바다 건너 신라와 백제, 고구려를 정벌하고 가야를 200년 동안 지배했다는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기록한 유일한 사서가 『일본서기』 이다. 임나일본부설은 고토수복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의 배경이 되어 1592년 임진왜란 등 조선침략의 명분이 되었다.

임나일본부설의 중심에 가야=임나설이 있다. 『일본서기』는 임나에 ‘기문(己汶)’과 ‘다라(多羅)’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남원과 합천을 ‘기문’과 ‘다라’로 등재한다면 전 세계인에게 남원과 합천은 『일본서기』 임나국으로 공인받게 되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에 대응하기 위한 가야사 복원이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동조하고 뿌리내리게 하는 가야사 왜곡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임나=가야’ 설의 문제점

우리 역사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은 한일 역사학자들의 합의로 폐기된 학설”이므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한일 역사 공동연구위원회>는 한일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모두 반영한 것도 아니고, 발표 내용도 외교관계를 고려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근거는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볼 수 있다. 공식 폐기되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역사교과서에 버젓이 살아있다. 가야 지역은 ‘임나(任那)’로 표기되고, 가야 유물은 ‘임나(任那) 유물’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 학계의 주류설은 '임나=가야'설이다. ‘임나=가야’설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대전제이다. 그런가 하면 지난 150여 년간 일본정부(육군참모본부)와 일인학자가 주동이 되어 일본고대사의 진실을 은폐하고 허위의 일본고대사를 조작하기 위한 하나의 작업으로 가야와 임나를 동일시해 왔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와 내용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근거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일본서기』 권9 기장족희존 신공황후조 9년(200년) 거울(10월3일), “신라를 정벌하였고, 고구려와 백제도 군세를 보고 이길 수 없음을 알고 항복하였다. 그 이후로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이것이 왜의 삼한 정벌 내용이다.

두 번째는 ‘광개토대왕릉비문’ 중 신묘년조 기사이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의 6년(396) 병신년 기사의 앞부분을 떼어내어 신묘년조라고 하고 그 내용은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신묘년(391)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임나(가야)·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여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여 조선침략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 주체인 고구려가 생략되어 있는데 고구려를 넣어 해석하면 명백해진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고구려의)속민이라 예로부터 조공을 바쳐왔고, 왜는 신묘년 이래로 (조공을 바치러) 바다(海)를 건너왔다. 백잔이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으려고 하므로 이를 깨기 위해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백제)을 토벌해 승리했다.”

따라서 병신년 기사는 왜가 백잔·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칠지도’의 명문이다.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에 “백제왕이 칠지도를 왜왕에게 바쳤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 학계에서는 대체로 백제왕이 칠지도를 왜왕에게 하사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백제왕, 여기서 백제왕은 온조왕의 백제가 아닌 삼한백제를 의미하며, 삼한백제가 가야를 정벌하고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비판

식민사학에 맞서 고대 한일관계사를 평생 연구하셨던 고 최재석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의 비판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임나(가야)나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이름은 한반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마도와 왜 열도에도 있었다. … 상식으로 생각하더라도 『일본서기』는 일본 역사책이므로 일본 열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위주로 기술되었을 것이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일본 열도 안에 있던 나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가 아니라 일본 열도에 있었던 나라임을 분명하게 하는 기록들이 『일본서기』에 보인다.”

그의 다른 논저 「고대 한ㆍ일 관계사 연구」에서 일본 고대 사학자들은 그 표현은 다를지라도 그 내용은 모두 『삼국사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거나 고대 한국은 일본의 속국 내지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동안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에서 당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은 고려하지 않았다면서 고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의 구체적 파악은 일본이 당시에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는가, 또는 당시 일본이 한국으로 건너와 고대 한국을 일본의 속국 내지는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는가 여부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고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본 결과, 『일본서기』에 왕권도 갖지 않은 것으로 기록된 일본 천황, 독립국으로 존재하기에는 너무 협소한 일본의 강역, 한국의 협조 없이는 해외로 나갈 수도 없었던 일본의 조선ㆍ항해 수준, 7세기에 이르러서야 시행된 일본의 관위 등 고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고대 한일 관계사 서술은 누구의 주장이든 간에 허구의 주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원이 기문국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된다면

1조원 이상의 국민 혈세가 들어가는 대한민국 정부의 ‘가야사 복원’ 사업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부활’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것은 비단 남원과 합천만의 문제라거나, 유네스코 등재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유네스코 등재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학계는 『일본서기』를 마음껏 인용하고 연구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고 국민의 눈치를 보며 드러내기를 주저했던 임나=가야설은 정설로 둔갑해서 『일본서기』의 ‘임나 4현’과 ‘임나 7국’, ‘임나 10국’ 그리고, 임나의 소국을 모두 한반도 남부에 비정하는 임나일본부설이 화려하게 부활될 것이다. 또한 임나일본부만의 문제도 아니다. 내년에 유네스코 등재 신청을 계획하고 있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 유적도 『일본서기』를 인용하여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영산강 유역이 야마토 왜의 식민지가 되는 ‘마한일본부설’이 우리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 남원과 합천은 가야사 말살의 최전선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영토를 팔아먹고 한반도 남부를 야마토 왜의 식민지로 바치는데 국고가 쓰이고 있다. 이런 반민족행위는 학문의 영역을 초월해서 국민정서와 역사정신에 반하는 친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가야사 연구가 미진했던 이유

그 동안 가야사 연구가 미진했던 이유는 사료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학계의 편견도 한 몫을 했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가야가 존재했던 대부분의 기간을 삼국시대라고 규정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만이 그 시대의 주역이었던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야사를 신라의 변방사 정도나 부족국가사로 취급했으며, 가야는 국가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 뒤쳐진 정치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 가야지역은 3세기 이전의 삼한시대에는 변진 12국으로 나뉘어 있다가, 이들이 통합되어 4세기 이후에 6가야만 남게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가야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최초 역사서인 『삼국사기』는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의 후손인 김부식이 만든 역사책으로써 신라 중심의 승자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신라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역사만을 우리 역사에 편입하고 저술했으며 부여, 가야, 발해(말갈) 등의 역사를 제외하였다. 그리고 가야사의 경우는 『삼국유사』 등에서 단편적으로 기록은 했지만 설화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되어 있는 상황이다.

낙동강 상류의 고령지방에 가야족이 건립한 대가야, 즉 미오야마국을 중심으로 한 고대 가야인들은 일본 규슈지방으로 건너가 그 세력을 넓히고, 오랜 기간 후에 기내(지금의 오사카 지역)에 진출하면서 미오야마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 부족들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가 ‘야마토국’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마’국이 중심 토대가 되어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야마대(邪馬臺)라고 쓰고 야마토라고 불렀다. 이는 고대 한국어가 ‘토대’의 ‘대’를 ‘토’로도 혼용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야마’라는 지명은 지금도 일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규슈 북부지역에 많이 산재하고 있다.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 수록된 변한12국 중의 하나이다.

21세기, 왜 가야인가?

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70년대 이후 유물이 쏟아지면서 주목을 받게 된 가야, 우리나라 국민의 3분의 1은 가야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가려 주목 받지 못했다.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며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녔고,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뛰어난 철기 문화로 아시아뿐만 아니라 서역까지도 그 영역을 넓혔으며, 일본 문화의 뿌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다른 새로운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만들고 융성 시켰던 나라가 가야이다. 그 가야에는 집중과 통제가 아닌 자율과 경쟁의 리더십으로 가야연맹을 이끌었던 김수로가 있었으며, 가야의 어머니가 된 정견모주가 있었다. 오늘날 제철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포스코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우리나라 조선업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철의 왕국, 해상교역의 왕국, 가야의 힘에서 나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야는 삼국과 비슷한 시기에 건국하여 6세기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나름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21세기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가야의 역사와 문화는 한 몫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야에 대해 기록된 정보에 근거해 정리한 내용 및 기존 학설

​첫째, 가야는 여러 소국 연맹체로 구성된 국가로써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면서 존재하다가 562년 신라군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둘째, 가야는 2개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전자는 김수로왕을 6가야의 대표로 설정하여 금관가야 중심의 김해를 중심으로 한 신화이며 후자는 고령 반파국을 형(兄)으로 설정하는 등 대가야 중심의 고령을 중심으로 한 신화이다.

셋째, 가야의 역사는 크게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데 전기 가야연맹의 대표를 금관가야이며 후기 가야연맹의 대표를 대가야라고 한다.

​넷째, 현재 가야 왕들의 계보는 오로지 신라 김유신 장군의 선조인 금관가야의 왕의 계보만 전해지며 다른 가야 왕들의 계보는 없고 단편적인 사건발생시 왕들만 기록에 있다.

​가야의 역사를 정리한 내용 및 향후 과제

​첫째, 실제 가야라는 명칭은 출전과 시대에 따라 가야(伽倻, 加耶), 가라(加羅), 가락(駕洛), 구야국(狗邪國), 남가라(南加羅), 금관국(金官國)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국가명까지 정확하지 않다.

둘째, 우리나라 『삼국유사』에서는 6가야에 대해서만 위치를 기록했지만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서는 가야와 관련된 많은 나라가 보이는데 『일본서기』에는 10개의 나라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24개 나라가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연구가 필요하다.

​셋째, 일제강점기 친일 사학자 이병도의 주장에 의하면 고령가야의 위치가 역사적 근거 없이 경남 진주로 정했는데 실제로 경상북도 상주에 고령가야 왕릉이 있다는 점은 가야의 영역에 대해 더 많은 연구와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넷째, 일반적으로 백제의 영역으로 배웠던 전라도 지역에서 다량의 가야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는데,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경상남도에 한정된 가야의 영역을 뛰어넘어 전라북도 내 가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가야의 영역에 대해서 새롭게 확대 및 변경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전라북도 유물, 유적 발굴과 관련된 반파국의 존재이다. 만약 반파국을 대가야로 동일한 국가로 인정할 경우에 전라도 지역까지 영토를 가진 대가야는 실제로 백제, 신라와 필적할 힘을 가진 강한 국가로써 새롭게 연구 할 필요가 있으며 만약 반파국이 대가야가 아니고 전라북도 내 별도의 독립된 가야왕국이라면 6가야 역사를 탈피하여 새로운 가야 역사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학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다

결론적으로 신비의 나라 가야는 현재 진행 중인 유물ㆍ유적 발굴 및 분포를 고려해 볼 때 기존에 생각했던 경상남도 영역의 작은 나라가 아니며 경상북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일부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상당히 강한 국가로서 조속히 가야의 영역에 대해서도 역사학계에서는 공식적으로 변경 또는 재정립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 정보에는 기록된 정보와 유적ㆍ유물을 통해 말해주는 정보가 있다. 이것은 서로 상호 보완관계에 있으며, 기록된 정보 간에도 고증을 통해 역사의 오류가 없도록 해야 되고, 추론이 필요할 경우, 인접 학문들의 도움을 받아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야 된다. 거기에 정치적 목적이나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개입이 된다면 크나 큰 역사적 과오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연구는 시대적 사명감과 인류사적 관점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 가야사 복원 사업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바라 볼 때 국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어야 된다. 국학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들어 주는, 그래서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을 목적으로 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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