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과 한민족 국가 간의 관계
말갈과 한민족 국가 간의 관계
  • 민성욱 박사
  • k-spirit@naver.com
  • 승인 2021.07.07 0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칼럼] 민성욱 박사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에 존재했던 많은 국가 또는 집단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만주지역에서 비롯되었던 한민족의 여러 국가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기록상으로 『삼국사기』 에 등장하는 수많은 말갈 관련 기록과 중국 정사 중 「동이열전」에 등장하는 말갈계 종족들의 기록들, 『수서』이후에 등장하는 말갈은 독립된 열전으로 처음에는 「동이열전」에서 시작해서 「북적열전」으로 이어지는 관련 기록이 많아 남아 있다. 일본사서에는 『속일본기』,『유취국사』 등에 말갈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말갈은 스스로 역사기록을 남겨 놓지 않아 그 실체 규명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말갈 관련 관계 기록 많이 남아 있고 그 기록들 중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러시아가 연해주 지역 등 옛 말갈 또는 발해지역 터에서 적극적으로 유적지 발굴조사를 하여, 중국과는 전혀 다르고 고구려나 발해 유적도 아닌 유적이 발굴되는데, 그 유적을 말갈 유적으로 보고 있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옛 역사에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고유한 그들의 문화를 유지 및 발전시켜 왔던 말갈인들의 흔적이 밝혀짐으로써 그 실체가 확인되고 있다.

말갈의 후예를 자처하는 소수 민족

그런가 하면 중국 흑룡강성 및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말갈의 후예를 자처하는 소수 민족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우데게인과 나나이족이다. 우데게에서 우드는 숲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 우데게인은 숲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나나이인의 명칭은 땅이라는 뜻의 ‘나’와 사람이라는 뜻의 ‘나이’가 합쳐져 ‘이 땅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나나이인은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하여 중국 문화와도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한편 국내 유명의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중국인 멤버였던 한경은 중국에 거주하는 나나이인으로 알려져 있다. 우데게인은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바이칼 동부지역에서 아무르 강 상류로, 그 후 다시 만주 남부와 연해주로 이주한 고대 퉁구스족 일파인 ‘읍루’라는 수렵 종족의 후손이다. 우데게인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계통의 종족들, 즉 고아시아계 원주민, 서해와 동중국해 해안을 거쳐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오스트로네시아계 종족, 바이칼 동부에서 이주한 읍루족을 비롯한 퉁구스계 수렵 종족을 기반으로 형성됐다. 따라서 우데게인 북부 그룹은 일부 고아시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남부 그룹은 고조선, 발해, 튀르크, 퉁구스, 만주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데게인의 조상은 발해 건국에 참여했으며,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주변 소수민족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말갈의 새로운 의미

그렇다면 말갈의 종족 명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한자 뜻대로 하면 오랑캐 중 오랑캐다. 중국은 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주변 나라들과 종족들을 폄하 또는 비하하는 습성이 있다. 어떤 종족이든 그들의 종족 이름을 지을 때는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에 착안하여 말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부여해 보았다.

첫 번째, 말 = 크다(大), 갈 = 칼 혹은 활, 말갈은 큰 칼 또는 큰 활을 차고 만주벌판을 말달렸던 사람들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두 번째, 말 = 많다(多), 갈 = 고을(邑), 말갈은 만주 및 한반도 북부 전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집단을 의미한다.

세 번째, 말 = 물(水), 갈 = 고을(邑), 말갈은 물가(강가나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네 번째, 말 = 말(馬), 갈 = 고을(邑), 말갈은 말을 잘 타는 사람들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 말 = 한, 갈 = 고을(邑), 말갈은 크게 밝고 환한 종족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갈을 다섯 가지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해 보았는데, 이때 말갈은 우리 민족을 뜻하는 ‘동이’나 ‘한민족’과 유사한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가능성을 열고 말갈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고대사 인식 체계의 변화

그 동안 전통적인 한국 고대사 인식 체계에 따라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중국사서의 기록만 맹신함으로써 말갈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가 발생하였다. 특히 중국학계의 경우 연구 자체가 동북공정과 연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일본은 과거 만선사관과 일선동조론에 입각한 연구 결과이므로 현재는 그 설득력을 잃은 상태이다. 반면 한국학계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등장하는 말갈을 동예 등으로 보는 “위말갈설”이 지배적인 인식이었다. 기존 연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 결과 말갈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별로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말갈을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던 예맥계통으로 보아야 하고, 고구려 남하정책 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변방주민을 일컫는 범칭이 되었다가 후기에는 예맥계와 숙신계의 융합 형태로서 고구려를 구성하는 종족으로, 또는 발해 건국의 주체와 기층민으로 각각 참여하게 된다.

최근 사료의 기록에 대한 재해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말갈의 실체가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관계사 연구가 필요하다. 개인도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처럼 집단도 서로 관계를 통해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 나간다. 고대국가 성립기에서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상호 경쟁하면서 국가체제를 확립해 나갔을 것이다. 특히 백제는 건국 이후 최초 대외정책이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출발했지만 이렇게 말갈과의 전쟁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국가체제를 조기에 갖추게 되었고, 고구려나 신라보다 빠른 시기에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듯 말갈은 실체적 관계 속에서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을 이루었고 이것은 향후 발해 건국에 참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한국사의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통해 우리 역사 구성원으로서의 편입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갈과 숙신의 관계

말갈은 대체로 그 뿌리를 숙신으로 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의 학자들은 숙신과 조선이 같은 집단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숙신에서 비롯된 것이 조선이고, 숙신이 동쪽으로 이동 한 후 비롯된 것이 읍루, 물길, 말갈 등 만주지역의 제 종족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서』의 숙신은 읍루라고도 한다. 『북사』의 물길은 말갈이라고도 한다. 『신당서』의 “흑수말갈은 읍루라고도 불렀으며 물길로도 불렀다”를 종합해 보면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흑수말갈)이 되는데, 이들 중 숙신이 가장 이른 시기부터 문헌에 등장하므로 기원 종족으로 추정된다. 아무르강 연안 및 연해주에는 이들과 계통이 다른 고아시아족, 알타이계 튀르크족과 몽골족, 한민족 등의 출입이 빈번했고, 그들과의 교류로 인해 숙신의 분화가 발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읍루 – 물길 – 말갈이 출현했고, 숙신은 이들의 연맹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 이후 말갈이 강성해지고 다른 세력들을 압도하면서 중국사에 등장한 563년 이전에는 세력의 역학 관계에 따라 때로는 숙신이, 때로는 읍루가, 때로는 물길이 그 연맹체를 주도하면서 문헌에 계승관계에 있는 듯 기록된 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한족과는 역사와 문화적 경계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고대 숙신과 조선 그리고 그러한 체제가 붕괴된 이후 여러 나라로 흩어질 때부터 등장하는 말갈, 그들 간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동일한 지역에서 유래되었고 동일한 정치적 체제 하에 있었다고 한다면 동일한 정신문화를 공유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 건국 후 말갈계 고구려인, 대조영은 전대의 역사인 고구려 역사가 아닌 단군조선의 역사인 『단기고사』를 간행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말갈과 부여의 관계

고조선부터 한민족의 뿌리로 보는 모든 국가들은 한반도에 한번쯤은 영토가 있었던 이력이 있었으나 부여는 한반도에 영토를 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후 발생하는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를 정신적으로 계승한 국가이다. 특히 백제는 왕실의 성을 부여씨로 했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는 등 부여의 정통성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삼국 성립 전의 만주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나라가 부여다. 만주지역의 여러 종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부여의 문화를 정착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말갈 7부중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대표적인 예맥계 말갈로 부여계 말갈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부여계 말갈은 같은 부여계인 고구려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고구려인이 되었다.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말갈을 제압할 수 있었고, 그러한 말갈을 부용세력처럼 활용하였다. 신라나 요서지역을 공격할 때 말갈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말갈은 분포지역에 따라 다른 형태의 말갈이 존재하였고, 예맥계 말갈인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자연스럽게 고구려에 동화되거나 복속되었고, 속말말갈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하여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들을 주축으로 해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말갈과 백제의 관계

백제는 낙랑과 말갈의 인접 지역에서 건국하였고, 건국 초기부터 낙랑과 말갈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말갈과의 전쟁을 통해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으며, 고이왕계에 이르면 말갈과 백제 간의 평화관계가 유지되는 데, 이것은 고이왕계가 말갈계인 진씨왕통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온조왕계인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제와 말갈은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고,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던 말갈은 고구려와 백제와 연합해서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신라의 30여 성을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신라, 발해 등과 같이 분할 통치하기도 하였다.

말갈과 신라의 관계

신라 일성이사금 때 이찬 웅선은 말갈 정벌이 불가함을 아뢰었고 왕은 그것을 받아 들여 말갈을 정벌하지 않았다. 이것은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신라와 말갈 간의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말갈은 삼국 성립기 이전에 이미 만주 및 한반도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고, 삼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삼국의 발전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 말갈의 뿌리가 숙신에 있고 그 숙신이 단군조선과 관련이 있다면 말갈의 위상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왕 때 통일 이후 중앙군사조직(구서당)에 말갈국민으로 조직한 ‘흑금서당’을 편성한 것은 당시 고대 신라인들의 말갈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과 발해의 관계

만주에는 발해라는 옛 고대국가가 있었다. 현재 만주에는 만주족이 살고 있고 그 만주족의 전신인 말갈족이 살았던 곳이다. 말갈, 발해, 여진은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서는 순차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러시아 학계의 의견은 한국과는 다르다. 말갈 다음에 발해가 존속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말갈과 발해가 모든 지역에서 순차적인 관계를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말갈을 발해와 병행적인 관계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별로 정확하게 나눌 수는 없어도 분명 동시대에 발해와 말갈은 공존했었고,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우수한 발해문화를 공유하면서 결국 발해에 복속되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말갈과 한민족은 만나왔고, 말갈과 한민족은 함께 발해를 이루었고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였다. 말갈과 한민족은 하나로서 발해의 주인이었다.

말갈과 옥저의 관계

옥저는 기원전 4~3세기경부터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정착하면서 동해안을 따라 연해주로 이어지는 환동해 지역에 살았던 집단이다. 옥저의 북쪽에 있던 집단인 읍루는 더욱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다. 읍루인은 옥저인이 살고 있는 곳에 내려와서 자연스럽게 섞여 살았고, 나중에 고구려와 백산말갈을 형성하였다. 속말말갈이 부여계 말갈이라면 백산말갈은 옥저계 말갈이다.

고고학 자료들은 옥저와 읍루를 변방의 작은 오랑캐 집단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동해안의 독특한 지리환경에서 고유한 문화를 발달시킨 사람들이고 문화적 저력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북방지역 연구를 통해 남한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던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갈은 한국고대사의 인식체계를 바꿀  핵심 키워드

이제부터라도 말갈을 한국고대사의 인식체계를 바꿀 수 있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한국사에서 말갈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국내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면밀히 검토하였고, 후대의 기록인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말갈(여진)관련 기록이 나오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또한 중국25사나 일본사서인 『일본서기』나 『속일본기』 등에도 말갈(발해)관련 기록들이 나오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역사 문화적으로나 종족계통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와는 그 친연성이 많았고, 연관성이 많았던 말갈은 분명 한국사에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현재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 중 하나이므로 한민족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인식해야만 발해사를 온전하게 한국사로 편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말갈과 한민족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

말갈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종족이 아니다. 동일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갖고 보면 우리 이웃으로 존재하기도 하였고, 우리 역사의 일부로서 존재하기도 하였다. 만주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살면서 그들은 때때로 고구려나 발해에 복속되기도 하며 점차 선진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다. 말갈은 많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독립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자체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서가 없기 때문에 그 실체를 규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몇 몇 사서에 보면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내용들이 나온다. 이렇듯 한ㆍ중ㆍ일 사서에 직ㆍ간접적으로 말갈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말갈이 존재했던 그 시대만큼은 말갈이 동아시아 국가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말갈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고구려인에 이어 발해인으로 살았다.

중국이 북방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고자 할 때 우리가 고구려(기원전 37년 ~ 668년)와 발해(698년 ~ 926년)에만 집중하는 것은 고구려와 발해를 제외한 시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 공간이 아님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갈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제대로 연구를 안 했을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선입견이나 왜곡된 관점을 버리고 말갈을 온전하게 바라본다면 고조선 이후로 말갈과 한민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만주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고구려와 발해에 편중되어 있다. 이렇게 편중된 관심과 연구만으로는 한국의 고대 역사와 문화의 규명이라는 커다란 연구 흐름을 이어 나가기 힘들다.

말갈 같은 북방계통의 집단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혈연적인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들의 환경에 적응해 왔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자 다른 생활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시대를 거치며 그 범위가 확대되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한반도 중에서도 남한이다. 우리 역사의 공간적 배경은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이었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옥저, 동예 등의 무대가 북한과 만주지역이기 때문이다. 북방으로 올라가면 이름만 알려져 있고, 자세한 생활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역사가 많이 숨어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기층민이었던 말갈과 같은 집단들은 한국 고고학과 고대사의 일부 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다루어지지 못한 채 잊혀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 역사 기록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다. 문헌자료가 부족한 여러 민족들의 역사는 변방사, 또는 주변 역사로 취급되어졌고, 한국사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는 소외되거나 배제되어 왔다.

다행히 고고학 연구 덕분에 만주지역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막연했던 북방민족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고 있다. 문헌 자료가 부족한 만주지역의 역사인 말갈의 역사를 통해 고조선 이후 만주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역사 공백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그 기억은 다시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역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잘못된 역사인식은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집단의 의식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되는 것이다.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관련이 없습니다. 

 

 

12
0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