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가 말갈이다. 그것은 바로 만주사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한반도에 갇힌 역사가 아닌 민족의 원류가 북방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한반도로 귀착되기 전에 만주가 주된 역사 공간이었다.

현재 만주는 역사연구적으로 보면 비어있는 공간이다.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 강제로 현재 기준으로 만주를 비롯 동북아지역에 존재했던 민족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탈바꿈시켰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그 만주지역에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가 그 이전부터 오랜 기간 존재했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지금의 중국을 만든 한족의 역사와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것은 분명 역사왜곡이고 옛 역사터전을 잃고 한반도에 갇혀 그것도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민족의 실상으로 볼 때 안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주(滿洲)’ 라는 말은 ‘물가’라는 의미의 만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대체로 요하 동쪽의 지역을 가리키는데, 대체로 중국의 동북삼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에 해당된다. 만주지역의 대표 종족으로는 우리 민족인 예맥족과 숙신ㆍ읍루ㆍ물길ㆍ말갈ㆍ여진 등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말갈족과 요하의 지류인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족 등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말갈인식은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 중에서 말갈(靺鞨)은 만주지역의 대표종족이자 고조선 이후로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고구려와 발해시대에는 어떠한 종족보다도 화려하게 역사무대에 등장했다가 많은 영향을 미치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한 말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조선후기 실학파가 등장하면서 달라진다. 당시 국제질서의 변화에 따른 실학파 등의 역사인식이 주체적으로 바뀐다. 단군조선으로부터 출발하여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강조함으로써 한국사 강역의 범위를 만주로 확대하여 한반도 중심의 고대사 인식체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역사관으로 계승되었고, 대일항쟁기의 신채호, 박은식, 장도빈, 권덕규 등과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무원 김교헌은 대일항쟁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민족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말갈을 한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본류 중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현재의 역사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 고대사의 공간적 배경이 분명 만주와 한반도 지역이라고 할 때 만주의 대표적인 종족인 말갈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될 필요가 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관을 계승하여 한반도에 갇힌 역사관을 극복하고 진정한 역사 광복을 이루려면 만주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정립하여야 한다. 오랜 기간 만주지역에 존재했고, 고조선 이후부터 우리 역사와 함께 했으며,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는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던 말갈인데 그 동안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로 일본과 중국이 주도하였던 말갈연구를 우리 역사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인식체계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말갈의 실체는 여러 국가(민족)들과 관계사를 통해 밝혀질 수 있다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국가(민족)들과의 관계사가 남아 있다. 이러한 관계사적 고찰을 통하여 민족적 특성과 함께 역사 귀속의 문제도 밝혀질 수 있다. 중국 입장에서 한낱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이지만 한국은 그 근원이 되면서 주된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의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역사가 그러하고 그 이후 부여가 있었고, 고구려 때에 오면 다물이라고 하여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결국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던 발해의 대조영은 동생 대야발에게 단군조선의 역사서인 『단기고사』를 쓰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도, 발해도 모두 그 뿌리는 단군조선에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발해를 건국한 주체의 성격도 규정이 가능하고 대조영의 출자 관계도 정리할 수 있다. 이렇듯 말갈이 한민족의 한 갈래이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한 일원이라면 우리 역사가 외면하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위와 같이 고구려사와 발해사가 그러했고 그 뿌리가 되는 고조선의 역사가 동북아시아의 중심이었다. 한반도를 비롯하여 만주지역과 요동ㆍ요서지역을 모두를 아우르는 지역은 동북아시아를 주도하는 민족과 국가들과 관련이 많다. 따라서 그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주 전역에서 그 생활터전을 갖고 있었고 유목민족으로서 이동을 반복하면서 여러 민족을 만났고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 지역의 새로운 역사를 써 왔던 말갈. 비록 스스로 역사서를 남겨 놓지는 않았지만 관계사적 측면에서 말갈과 여러 국가(민족) 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사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고구려가 성립되기 전에 이미 말갈집단이 존재했으므로 그들은 어떤 존재인지와 백제와 신라와는 다르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고구려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는 말갈은 고구려의 피지배계층인지 아니면 고구려 변방 주민들에 대한 비칭 혹은 범칭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후대인 발해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번째, 백제와의 관계에서 백제 건국 초기부터 말갈은 백제를 괴롭혔고 온조왕은 건국 초기 가장 집중했던 것이 말갈과의 대외관계였다. 어떻게 보면 말갈과의 전쟁 수행을 통해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졌고 그래서 삼국 중에서 백제가 가장 빨리 최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이왕 때가 되면 말갈과 이상한 평화 관계가 유지가 된다. 그래서 제기가 되는 것이 고이왕의 친말갈 정책은 고이왕이 말갈계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만약 고이왕이 말갈계라면 이것은 한국고대사를 다시 써야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백제는 고이왕 때 고대국가로의 기틀을 잡았고 좌평과 같은 관등제도도 이때 나왔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조 기록를 보면 ‘국가 동유낙랑 북유말갈’이라고 해서 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말갈의 위치를 알려 주는 내용이고, 여기서 낙랑은 요서지역에 있었던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이다. 즉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백제의 초기 건국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지역이었다는 사실 또한 알려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과 낙랑은 서로 인접해 있었고 관계 또한 우호적이었으며, 특히 낙랑의 요청으로 백제를 공격하는 행태도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말갈과 낙랑이 동일한 종족 계통이거나 서로 이해관계가 부합이 되었기 때문에 함께 동맹을 맺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조선 붕괴 이후 열국시대에 즈음하여 열국을 크게 두 가지 계통인 부여계와 진계로 나눌 수 있다고 했을 때 같은 진계로 상당한 친연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네 번째, 신라와의 관계이다. 신라와 말갈의 접촉은 고구려와 백제보다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다. 이것은 초기신라와 말갈은 서로 만날 수 없었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말갈의 침략에 왕이 반격을 지시하지만 이것이 불가하다는 여론이 있었다. 당연히 말갈의 침탈로 백성들이 곤경에 빠져 있었다면 말갈에 맞서 반격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사정이나 이유가 무엇인지 안다면 말갈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소위 말하는 통일 신라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중앙군의 군사편제를 9개의 서당, 즉 구서당으로 구성하는데 구서당의 구성이 의미심장하다. 신라계 3개, 고구려계 3개, 백제계 2개, 말갈계 1개로 구성된 구서당은 특히 제 6서당이 ‘흑금서당’으로 그 구성원이 ‘말갈국민’이었다. 즉 삼국시대 이후 후기신라시기에 중앙군으로 왕의 친위부대인 구서당을 구성할 때 그 여섯 번째 서당을 오로지 ‘말갈국민’으로 구성하였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규모만 달랐을 뿐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등하게 말갈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7세기 신라인들의 세계관으로 보면 삼국시대가 아니라 말갈을 포함하는 사국시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신라와 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는 신라와의 동맹을 무시하고 신라까지 병합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나당 전쟁이 일어났고 이제 한민족의 운명이 걸린 한판 승부가 벌어지는데,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당나라 군대를 축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 군대에는 이상한 집단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말갈병과 거란병이었다. 당군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흩어진 말갈족과 거란족을 흡수하여 당군으로 결성하여 신라전에 투입한 것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에서 고구려군 선봉에서 싸웠던 말갈군들을 전쟁이후 잔인하게 생매장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미웠던 대상이었다. 그런데 신라와 전쟁에 버젓이 그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말갈인도 마찬가지다.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전쟁에서 고구려를 위해 목숨 걸고 선봉에서 열심히 싸웠던 그들이 이제는 당나라편이 되어 신라군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말갈은 그 전의 말갈과는 다른 존재인지 알 필요가 있겠다.

일곱 번째,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지역 곳곳에서 고구려 복국운동이 일어났다. 고구려의 왕족이나 귀족 등 핵심집단들은 당나라의 산개정책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주거지역에 남아 있었던 말갈계 고구려인들이 고구려 복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그들 중심으로 발해가 건국이 되었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처음에 말갈국이라고 불렀고, 신라도 발해 말갈 혹은 말갈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최치원 때 와서 발해를 ‘북국’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에 나오는 말로 바로 발해에서 스스로 강대국을 자처하면서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된다고 당나라에게 정식으로 요청하였지만 당나라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에 최치원은 너무나 감읍한 나머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라는 표문을 지어 당나라 황제에게 올리게 된다. 즉 이것은 발해가 위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은 당나라 황제에게 감사하는 표문이다. 당시 당나라인과 신라인들은 발해인들을 말갈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발해를 북국이라고 표현하면서 신라와 발해를 남ㆍ북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발해가 곧 말갈이며, 말갈이 곧 발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덟 번째, 발해왕은 일본왕에게 국서를 보내면서 고려국왕으로 표현하여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8세기 초 발해를 지칭하는 말로 말갈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가하면 762년 일본열도의 동북변경에서 건립된 일본 미야기현의 다가죠비에는 ‘말갈국’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이 발해국을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정황으로 볼 때 발해국을 지칭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말갈족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일본의 말갈(발해)인식을 통해 일본과 말갈 간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아홉 번째,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많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이 신라로 귀순한다. 그런가 하면 발해가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자 많은 발해 유민과 말갈인은 고려로 귀순하게 되는데, 여기서 일정한 관계가 성립됨을 알 수 있다. 그 관계를 헤아려 보면 말갈에 대한 역사 귀속의 문제와 민족의 특성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열 번째, 말갈과 동시대에 같은 공간인 만주지역에 있었던 종족이 거란족이다. 동일한 시대, 동일한 만주지역에 존재했었던 거란과 말갈의 관계를 통해 만주지역 유목민족들의 특성과 고구려와 발해 등과 어떤 친연성이 있는지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갈을 통해 만주사를 정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기원과 원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단편적이거나 특정 사관에 입각한 지극히 제한적인 말갈 연구가 아니라 한국사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갈등을 해소하여 동북아시아 지역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면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인류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말갈족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다는 만주는 한국사에서는 특별하다. 한국의 고대 및 근대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주는 한국사와 많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갈사를 비롯한 만주사를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말갈의 전신이라고 하는 숙신, 예맥, 동호 등에 대한 연구와 후대의 제 종족들과의 연관성 그리고 북방유목민족들 간의 상호 연관성과 그들의 움직임이 갖는 세계사적 의의를 살펴봄으로써 한민족의 기원과 원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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