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무더웠던 주말에 코로나 때문에 뵙지 못했던 어머니를 충북 제천에서 뵐 수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의 상봉 시간이었다. 요즈음은 건강한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닐까 할 정도로 건강관리가 개인 간의 관계에서 가장 큰 덕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천은 堤川, 즉 냇둑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천 내 중요한 유적지인 의림지가 지명 형성에도 자연스레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제천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근처 의림지로 향했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역 승차장 광고판에서 보았던 의림지와 용추폭포, 그리고 유리 전망대를 현장에서 보았다.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빌려 내가 밀어 드렸다. 모처럼 모자지간에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당신의 자식을  직접 볼 수 있음에 기뻐하셨지만 날씨도 덥고 몸이 불편하니 많이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자식들과 추억을 만들고자 애써 사진도 찍어달라고 하셨다. 중간에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당황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내내 순탄했던 하루였다.

역사의 빛 vs. 역사의 빚

한 획 차이이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다르다. 역사의 빛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빚이 될 것인가 이것 또한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잘못되거나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기념하고 기억해 본들 그것은 역사의 빛이 아니라 역사의 빚으로 남을 것이다. 차라리 그렇다면 기념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음이다. 기존 삼한시대에 대한 역사인식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삼한시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고 최종적으로 남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에 묻혀 주변의 역사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머니과 함께 했던 제천 의림지에서 잊혀진 삼한의 역사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삼한시대부터 비롯되었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개용 수리시설, 의림지

의림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리시설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림은 의림지 제방 위에 조성된 소나무와 버드나무 숲이다. 주종은 수백 년 묵은 노송이며 버드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등이 함께 자라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낸다.

삼한시대부터 비롯되었다는 3대 수리시설인 밀양의 수산제,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는 우리 민족이 농경민족임을 보여주는 유적들이다. 즉 고조선 시대 이래로 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는 의미이다. 인류사적으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제천시는 의림지와 제림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호서의 호(湖)는 의림지

삼한시대에 축조된 저수지인 의림지, 충청도를 호수의 서쪽이라 하여 호서지방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 말하는 호수가 바로 의림지를 가리킨다. 그만큼 의림지는 오래되고 유명한 저수지인 것이다.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서 수리 역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농경 관련 유적이다. 의림지는 용두산 남쪽 기슭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저수지로서 본래의 이름은 ‘임지(林池)’였다. 고려 성종 때에 군현의 명칭을 바꿀 때 제천을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川)’이라 하였는데, 제천의 옛 이름인 ‘의(義)’자에 저수지의 이름인 ‘임지’의 ‘의’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호남의 호(湖)는 금강

반면 호남(湖南)의 호(湖)는 ‘금강’ 이다. 참고적으로 영남의 영(嶺)은 조령(새재)과 죽령(대재)을 경계로 남쪽 지역을 의미한다. 근래에 이르러서 시인 신동엽은 〈금강〉이라는 서사시에서 금강을 동학운동과 3·1운동 등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일깨우는 강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금강을 역사적으로 백제 정신을 재현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금강은 예로부터 뱃길로 이용되었고,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건들과의 관계는 문학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는데, 금강은 백제의 멸망, 동학운동, 대일항쟁기에는 쌀의 수탈 등의 사건과 연계되어 한(恨)의 강으로 그려지고 있다.

원래 금강은 호남평야의 젖줄로서 백제 시대에는 수도를 끼고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수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의 군사들이 짓밟은 뒤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금강은 줄곧 민족의 한을 머금은 비극의 강이 되었다. 동학운동 때에는 전봉준이 공산성나루에서 붙잡혀 금강을 건너 압송되기도 하였다.

금강은 우리나라 6대 하천 중 하나로 남한에서는 낙동강과 한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공주·부여 등 백제의 고도(古都)를 지나 강경에 이르러서는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道界)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당서(唐書)』에는 금강을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하였다. 금(錦)은 원어 ‘곰’의 사음(寫音)이다. 사음(寫音)은 글을 소리나는 그대로 적는 것을 말한다. 곰이라는 말은 아직도 공주의 곰나루(熊津)라는 명칭에 남아 있다. 일명 호강(湖江)이라고도 부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강의 명칭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즉 상류에서부터 적등진강·차탄강·화인진강·말흘탄강·형각진강 등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으로 되어 있다. 금강 유역은 대체로 백제의 심장부에 해당하며, 충청남도의 공주·부여와 전라북도의 익산을 중심으로 백제 문화의 복원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왔다.

의림지의 조성시기와 역사적 위상

의림지의 정확한 축조 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삼한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설도 있고,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700년 뒤 이곳에 온 현감 박의림(朴義林)이 쌓았다는 설도 있다. 제천은 고구려 영유기 때 이름이 내토군(奈吐郡)이었는데, 이는 시내[川]를 의미하는 말인 ‘내(奈)’에 방죽이나 제방의 뜻을 갖는 ‘토(吐)’의 결합어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제천의 옛 이름인 ‘내토(奈吐)’는 바로 의림지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림지는 제천 지역의 최대 평야 지대인 제천 분지를 관개(농경지에 물을 대는 일)하는 농경용 수리 시설로 만들어졌다. 의림지는 주변의 수전 개발을 촉진하고, 궁극적으로 농업 생산량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저수하여 가뭄과 홍수로부터 안전하게 전답을 보호해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제천의 의림지를 언제 처음 쌓았으며, 언제 고쳐 쌓았는지에 관한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그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것이 실로 안타깝다.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서 우리나라 수리 역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농경 관련 유적이다. 벽골제와 수산제는 이미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지만 의림지만큼은 여전히 현재까지 중요한 관개 수리시설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점에서 의림지가 농업 경제에 차지하는 위상과 경제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고대 수리시설은 뛰어난 토목기술의 상징

의림지와 함께 고대 수리시설 중 하나인 벽골제(碧骨堤)는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 저수지로 대한민국 저수지의 효시이고, 고대 수리시설 중 규모도 가장 크다. 축조 시기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으로 추정된다. 호남지방(湖南地方)의 호(湖)가 바로 벽골제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호남지역보다는 아래쪽에 벽골제가 자리잡고 있어 정설은 아니다. 가야는 3세기 초, 신라는 3세기 말에 각각 韓(삼한백제)에 병합되어 한반도 중부 이하가 통일된다. 가야 멸망의 대표적인 유물이 ‘칠지도’ 라면 신라 멸망의 대표적인 유적은 김제 벽골제이다. 벽골제는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토목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제천의 또 다른 명소인 청풍호

제천의 또 다른 명소가 청풍호 이다. 제천에 가게 되면 꼭 들리게 되는 곳이 의림지와 청풍호 이다. 청풍호의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답다. 청풍호는 충주호의 다른 이름이다. 충주호는 1985년에 건설한 충주댐으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 호수이다. 충주 계명산 아래에 건설한 충주댐 본댐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천시와 멀리 단양군 도담상봉까지 이르는 광활한 호수를 이루고 있다. 제천시에서는 충주호의 이름을 제천시 청풍면의 지명을 따라 청풍호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충주시에서는 통상적으로 댐의 이름을 따르고 있어 변경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미 민간에서는 충주호의 지역에 따라 청풍호, 탄금호, 단양호 등으로 불리고 있다. 댐건설로 수몰지역이 아름다운 호수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의림지를 통해서 본 삼한시대의 역사

제천의 의림지를 통해서 본 삼한시대의 역사는 고조선 이후 단절없이 역사가 전개되어 왔음을 입증해 주는 역사이다. 지금까지 삼한시대의 역사는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언급이 되더라도 삼국시대 형성 이전의 역사로 잠깐 언급되고 넘어 갔다. 그러다 보니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거나 심지어 고조선의 역사도 신화로 인식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삼한(마한, 변한, 진한)은 고조선 시대 때는 거수국으로, 고조선 붕괴 이후에는 독립하여 열국시대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어서 다시 민족의 재통합을 위하여 통일전쟁을 수행하면서 고대국가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고조선의 전통이 살아있었던 삼한시대가 지나고 고대국가 체제를 갖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주도했던 시기가 바로 삼국시대이다. 부여와 가야는 연맹체제였기 때문에 고대국가로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남은 삼국의 범주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삼국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 및 발전시키는 데 그 다리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고조선 시대 이래로 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는 관개용 수리시설인 의림지를 통해 농경민족으로서의 위상과 역사성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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