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정치의 정신, 역사에서 답을 찾다
정당정치의 정신, 역사에서 답을 찾다
  • 민성욱 박사
  • k-spirit@naver.com
  • 승인 2021-12-1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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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민성욱 박사

학생이 제출한 과제를 채점하는데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함께’라는 한국문화를 소개하면서 진정한 함께는 비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는 것이라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우산을 같이 쓰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서에는 비를 같이 맞는다는 것이 더 와 닿는다. 공감과 배려라는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느껴진다. 영화 <클래식>에서 비를 맞는 여자 주인공을 보고는 남자 주인공이 갖고 있던 우산을 놓아두고 함께 비를 맞으며 뛰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특히 배경음악과 함께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함께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함께하고 싶어진다. 이것은 연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스토리이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대한민국은 내년 3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본격적인 선거운동 기간이 아님에도 지금 그 양상이 뜨겁다. 서로 진영을 나누어서, 각 정당 후보자 간에 온갖 설전이 오가곤 한다. 모두 대한민국을 위해 국민의 여망을 안고 나온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 선거문화도 좀 더 성숙한 문화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런지‘함께’ 라는 우리 문화가 간절하다. 함께할 때 더 커지는 선한 영향력이 한국정치에서도 발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중세와 근세의 차이

왜 고려 시대를 중세라고 하고, 조선 시대는 근세라고 할까? 조선 시대가 고려 시대보다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발전하였을까? 그것 중 하나는 생산력이고, 두 번째는 인간 자유의 폭이 좀 더 확대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관리의 등용 제도로 과거시험이 일반화하였다. 물론 문음이라 하여 음서(혈연과 가문에 의한 등용)와 비슷한 것이 있지만 문음을 통해서는 고위관직에 오르기가 힘들었다. 실력이 있으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커졌고, 노력한 만큼 꿈을 이룰 여지가 많아졌다. 따라서 역사는 한걸음 진보했다. 또한 정부 내에서 언론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언론 장치들이 더욱더 세련되고 정교해진다. 권력자의 부당한 전횡 소지가 고려보다 많이 줄어든 것이다. 우리는 조선 시대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조선만큼 잘못 알고 있는 시대도 없다. 대일항쟁기라는 암흑의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조선의 역사는 왜곡되거나 폄하되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우리 역사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붕당정치의 왜곡

대일항쟁기 동안 식민사관에 빠진 학자들은 조선의 붕당정치를 맹비난했다. 만날 만나면 헐뜯고 싸우는 것이 조선인의 국민성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어떤 이는 조선인의 혈관에 검은 피가 흘러서 그런다고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그 시기에는 그런 말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 붕당정치는 일본인도 해 보지 못한 선진 정치였다. 같은 시기 일본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정당정치가 조선에서는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붕당정치는 공존이 바탕이 되는 정치 시스템으로 이러한 붕당정치가 왜곡으로 치달은 것은 일당 전제화가 되면서부터이다. 조선 후기에 환국정쟁으로 변질하면서 폐해가 불거지게 되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바로 이 시기의 모습이었다. 이것을 전체로 확대하여 해석해 마치 붕당정치 자체가 모순인 것처럼 조선인의 국민성까지 거론하며 비난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논쟁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가 하나의 의견만 가질 수 없다. 하나의 의견만 존재하고 강요한다면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다. 논쟁은 하되 상대의 존재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새도 오른쪽 날개(우익)와 왼쪽 날개(좌익)가 함께 있어야 하늘을 날 수 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고 다른 날개를 없애버리면 땅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조선의 체제가 갖추어질 시기에 주도 세력은 ‘관학파’였다. 그중 일부가 세조의 계유정난에 동참하여 권력을 쥐었을 때부터 이들은 훈구파로 불리게 된다. 훈구파(훈구는 대대로 임금이나 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가 있는 집안을 의미함)는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몸집을 불려갔다. 이에 반발하여 지방에서 중앙으로 올라온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사림파(훈구파에 대응하여 향촌 사회의 성리학적 질서와 수신, 그리고 왕도정치를 내세웠던 정치세력을 말함.) 이다. 이러한 사림이 중앙 정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성종 때이다. 성종 시기에 이들은 주로 삼사(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했던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로 진출했다. 그리고는 훈구파의 비리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또 이에 훈구파가 반격을 가하였고, 이것이 바로 사화이다. 사림(士林)이 화(禍)를 입었다고 해서 사화이다. 몇 번의 사화를 통해 사림파는 막대한 피해를 입지만 훈구파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선조 때가 되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때가 16세기이고, 훈구파는 거의 맥을 못 추다가 왜란을 거치며 소멸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을까? 훈구파는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고,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반면에 사림은 중소지주 출신에 향촌자치와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다. 양자의 대립은 결국 사화의 형태로 드러났다. 사화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이때의 사화는 훈구파 대 사림파의 대립이었고 조선 숙종 때 벌어진 환국정쟁(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집권세력을 바꾸는 정쟁)은 사림들 간의 권력투쟁이었다.

첫 번째, 무오사화는 연산군 시절에 있었던 일로 핵심 키워드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었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에서 중국의 항우를 거론하는데, 항우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으로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세조가 찬탈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안 그래도 사림파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던 훈구파인데, 이것을 기회로 삼아 사림파에 반격하게 된다.

두 번째, 갑자사화는 연산군 때 있었던 일로, 이때는 사림만 화를 입은 것이 아니라 훈구파도 상당히 다쳤다. 이 갑자사화의 계기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비의 죽음이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복수를 내세워 왕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신하들을 마구 죽여 버렸다.

세 번째, 기묘사화는 중종 때 일어난 일로, 기묘사화의 핵심 인물은 조광조이다. 조선의 3대 개혁가라고 하면, 조광조와 대동법 시행에 앞장섰던 김육, 조선의 마지막 불꽃을 되살리려 했던 흥선대원군을 들 수 있다. 조광조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면서도 포상을 받은 사람들을 가려내어 위훈을 삭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위훈 삭제의 주 대상이 훈구파들이었다. 또 현량과라는 천거제를 통해 지방에서 실력을 키우고 있는 사림들을 조정으로 대거 끌어 올렸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소격서를 폐지하였다. 훈구파의 입장에서는 위훈 삭제도 모자라 새로운 사림세력을 끌어 올리고 자기네 정신지주인 소격서를 폐지하고 있어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통해 결국 조광조는 역모자가 되고, 그가 중심이 된 사림도 엄청난 화를 입었다.

네 번째,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은 명종 때이다. 을사사화는 서로 다른 외척 세력 간의 싸움이었고, 소윤의 대표는 윤원로ㆍ윤원형 형제, 대윤의 중심은 윤임인데, 이 대윤과 소윤이 치고받는 과정에서 많은 사림이 피해를 보게 되었던 사화가 을사사화였다. 이렇게 화를 입으면서도 사림은 결국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 배경과 원천은 지역여론을 장악한 유향소(수령과 향리를 견제하기 위해서 만든 지방자치조직), 인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서원(학문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 농민을 단단히 통제 속에 묶어놓는 향약(향촌규약)에 있었다.

붕당의 형성과정

사림파는 사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붕당을 형성하게 된다. 사림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출발은 온건파 사대부의 거두, 정몽주이다. 그 뒤를 길재가 잇고, 그 다음이 김숙자, 또 그 다음이 김종직이다. 김종직의 밑으로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이 있는데, 이 김일손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인해 무오사화의 희생자가 되었다. 김굉필의 제자로는 이언적, 서경덕, 조광조, 김일국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죽게 된다. 그 뒤로 조식, 이황, 이이, 성혼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붕당이 형성되었다. 붕당의 ‘붕(朋)’은 벗이고, ‘당(黨)’은 정당할 때의 그 당이다. 즉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당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붕당이 만들어진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 번째는 척신의 청산과 관련돼 있다. 이제 사림이 정권을 잡았으니 훈구 세력을 처단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훈구 세력의 청산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한쪽은 씨를 말리자고 하고, 다른 쪽은 적당히 혼내주는 정도로 그치자고 한다. 전자가 동인이었고, 후자는 서인이었다.

동인당은 서경덕, 조식, 이황 등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김효원이 중심이 되어 만든다. 그리고 서인당은 이이, 성혼 등의 영향을 받아 심의겸이 만들었고, 동인당은 척신 처단에 대해 강경론의 입장을 보였다. 이들은 청렴결백을 앞세우는 신진세력이었고, 반면에 서인당은 온건론을 펼쳤다. 그런데 왜 동인과 서인이냐고 하면 김효원이 동대문 쪽에, 심의겸이 서대문 쪽에 살아서였다. 선조가 인격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사림을 많이 등용하고 문치주의로 정치를 이끌어 가게 되자,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정권이 등장한 이후 사림 내부의 분열로 붕당의 대립이 생겨났다. 붕당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조 전랑이란 6조 중 하나인 이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일컫던 말이다. 비록 관직은 낮았지만, 이들만이 관리를 천거할 수 있어서 이조 판서도 이에 개입할 수 없었다. 또한 여론 기관인 3사의 관리 임명도 이들의 영향 아래 있었고,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어서 그 권한이 매우 컸다. 훈구를 물리치고 정권을 잡은 사림은 1575년(선조 8년) 훈구파에 대한 처리를 놓고 두 파로 나뉘었는데, 양측은 서로 자기편의 인물을 이조 전랑에 임명하려 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조선 후기 붕당의 폐해를 막고자 탕평책을 추진하던 영조는 결국 이조 전랑의 후임자 추천권을 폐지하였다. 이조 전랑은 삼사의 관리에 대한 인사를 좌우할 수 있었고, 스스로 자기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인 삼사의 관리들은 언론을 통해 이조 전랑을 지원하였다. 이처럼 언론기관과 이조 전랑은 붕당정치 운영에서 공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 자리를 둘러싸고 붕당 간의 대립이 심해졌다. 나중에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졌다. 북인당은 서경덕과 조식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남인당은 이황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한편 서인 쪽에서도 분할이 이루어지는 데, 이이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노론을, 성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소론을 구성하였다.

붕당정치의 정신 vs. 정당정치의 정신

원래 붕당정치의 정신은 공존이었다. 현 정당정치의 정신은 공생이다. 결국 같은 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특정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면서 그런 공존 또는 공생 마인드가 사라졌다. 일단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결코 권력을 나눌 줄 모르고 독식해 버리는 것이 문제였다. 그 결과 일당 전제화와 환국이라는 폐해를 낳게 되었다. 권력과 부의 독식을 통해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두 차례의 외침을 겪게 되었으며, 병자호란의 결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었다. 사실 양란이 가져온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인적, 물적 피해뿐만 아니라 정치체제를, 나아가 여성의 지위마저 뒤흔들어 놓았다. 붕당정치의 공존 틀이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양란을 겪은 후 남은 붕당은 서인당과 남인당 이었다. 서인당은 남인당과 연합하여 공존 정치를 시작했다. 서인당과 남인당의 공존 정치가 빚어낸 대표적인 사건이 예송논쟁이었다.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으면서 왕을 비롯한 집권층은 자신들의 치부를 여실히 드러냈다. 백성들은 도망도 잘 가고, 성리학적 명분론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지배층의 모습을 직접 보았다. 양반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도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땅에 떨어진 권위부터 회복하려고 했고, 그 방편으로 삼은 것이 예절 강조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여성의 지위가 떨어진 이유도 양반들이 자신의 떨어진 권위를 집안에서도 세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예송논쟁(조선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된 두 차례 예법에 관한 논쟁)은 말 그대로 의례에 관한 논쟁이었지만 그로 인해 정권이 바뀌었다. 정권이 바뀐 이유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논쟁하다가 바뀌었다. 이렇게 예법에 목숨을 걸 만큼 그들이 절박했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 찾은 정당정치의 정신은 공생공존, 즉 홍익에 있다

조선의 붕당정치나 현재의 정당정치나 그 목적은 모두 공생공존에 있었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마지막 남은 붕당이 서인 중 노론이었다. 견제세력 없이 일당 전제화의 길로 갔고 왕권마저 약화되었으며, 결국 특정 집안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기에 이르러 국운은 쇠퇴하였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며,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개혁을 부르짖었던 집단들이 출현하였지만 정권 유지 목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여 탄압함으로써 결국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는 역사를 겪기도 하였다. 주권재민, 나라의 권력은 민(民)에게 있다는 말이다. 민주주의의 가치가 그것일 것이다. 민이 주인인 시대, 민의 역할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민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그 책임도 따른다. 그 민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지만 민이 나라의 주권자임을 자각하고, 주권자로서 행동하며, 책임을 지는 사람을 민주시민이라고 한다. 민주주의 기치 아래 정당정치의 목적인 공생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시민들이 먼저 홍익인간이 되어 홍익정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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