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변상도’, 부처의 가르침으로 고려를 디자인하다
‘사경변상도’, 부처의 가르침으로 고려를 디자인하다
  • 민성욱 박사
  • k-spirit@naver.com
  • 승인 2022-02-1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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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성욱 박사

몇 해 전에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대보적경사경변상도'. 듣는 이에 따라서는 상당히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단어이다. 단어를 끊어서 풀어보면 '대보적경(大寶積經)' 이라는 불교 경전을, '사경(寫經)' 손으로 베껴 쓴, '변상도(變相圖)' 경전의 내용을 압축해서 그린 그림을 말한다.

'대보적경사경변상도'를 소개하면서 등장하는 인물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이다. 천추태후는 역사 기록상으로는 불륜을 저지른 음탕한 여자, 권력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여자, 악랄하고 위험한 여자이다. 천추태후는 왜 이토록 역사가로부터 냉혹한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태후는 살아있는 왕의 어머니를 말하고 그가 살았던 궁의 이름이 천추궁이기에 천추태후라고 부른다. 그는 바로 고려 5대 경종의 비, 헌애왕후 황보 씨다. 태조 왕건의 손녀이지만 왕실의 여자는 모두 외가의 성을 따르게 되어 있었으며 왕실 내에서는 근친혼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헌애왕후 황보 씨는 태조 왕건의 친손녀이자 외손녀인데 사촌지간인 경종의 왕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 7대 목종의 어머니. 김치양과 불륜을 저지르고 12년간 아들 대신 섭정으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폐위된 여인이다.

하지만 '대보적경사경변상도'는 그의 이러한 오해를 풀어줄 보물로 등장한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천추태후와 김치양, 그 둘은 어떤 사이였을까? 당시에도 불륜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천추태후에게서 김치양은 사랑한 연인이자 정치적 동지였으며 국정 운영을 함께 했던 파트너였다. 인고의 세월이 지나 사랑과 권력을 차지한 천추태후는 그러한 자신감으로 연인이자 동지인 김치양과 함께 발원하여 '대보적경사경변상도'를 만들었다.

문화재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

'대보적경사경변상도'와 같은 문화재는 우리 조상이 남긴 유산으로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 민족이 살아온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성곽·옛 무덤· 불상이나 불탑 그리고 옛 그림·도자기·고서적 등과 같은 유형 문화재와 판소리·탈춤 등과 같이 형체는 없지만 사람의 행위를 나타내는 무형 문화재들도 있다. 또한, 자연 유산으로 일상생활 및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중요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천연기념물이라고 하여 문화재에 포함하기도 한다.

조상이 남겨놓은 유형·무형의 문화재는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중요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문화 발전에 바탕이 되기 때문에 현상대로 보존되어야 하며 우리가 잘 지키고 가꾸어 후손에게 길이 물려주어야 할 값진 자산이다. 이렇듯 문화재는 한낱 유물이 아니다.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역사다. 문화재는 그 자체로 민족의 자존심, 곧 국격을 상징한다. 간송 전형필이 대일항쟁기에 전 재산을 털어가며 문화재를 지켰던 것은 이런 문화재의 의미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선조들이 남긴 문화재를 하찮은 과거의 유물로만 생각할 때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되새겨볼 일이다.

2008년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국보 1호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국보 1호 숭례문은 2021년 11월 19일부터 '국보 서울 숭례문'으로 변경되었다. 이번에 개정된 '문화재보호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의거 국보,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등에 부여된 지정번호 제도가 개선되었다. 국보 1호 논란이 있던 숭례문은 화재 이후 국보 '지정번호 제도'가 개선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원래 문화재 지정번호는 가치 순이 아니라 지정 순서였다. 그런데 그것이 가치 순서로 오인되어 서열화 논란이 있었다.

국보 1호는 숭례문, 보물 1호는 흥인지문이다. 그런데 국보 2호와 보물 2호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1등만 기억하는 우리의 기억체계때문이다. 국보 2호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탑골공원 내 '원각사지십층석탑'이고, 보물 2호는 '보신각종' 이다.

이러한 문화재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그것을 통해 역사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예술의 관계

불교미술은 경전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다. 부처님 말씀이 어떻게 시각화되었을까? 종교와 예술은 서로 간에 그 어떤 내재적 연결 고리가 있어 분리될 수 없는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인류의 의식이 오늘날과 같이 각 영역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던 총체적 성격의 시대 및 사회에서는 종교와 예술 등의 이념이 명확히 분리되지 않은 혼용의 상태였다. 종교의 기능은 인간 본질을 회복하고 하는 것이며, 예술 역시 인간 본질을 살펴 아름답게 살아가고자 함이니 같은 가치를 지닌다 하겠다.

불교는 바로 부처의 가르침으로 그 궁극적 이상은 개인의 인격 완성인 ‘깨달음’과 아름다운 세상인 '불국정토'의 구현이다. 이념적으로만 본다면 한민족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붓다는 이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평생을 중생교화를 위한 설법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붓다 열반 후에 그 생동감 있는 설법을 들을 수 없었으므로 제자들은 당시를 회상해 경전으로 엮어낸다. 이후 이렇게 엮은 경전 내용을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예술 형식을 통해 표현해내는데, 이것이 바로 불교미술이 출현한 계기이다.

이처럼 불교는 출현 초기부터 예술과 결합해 부처의 말씀, 즉 추상적인 경전 내용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내는데, 이를 '경변(經變)' 또는 '변상도(變相圖)'라고 한다.

이러한 '변상도'를 그리는 목적은 예술 형식을 빌려 어려운 불교 교리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만약 '변상도'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변상도'가 있음으로써 우리는 지금 한 폭의 그림을 통해서도 어려운 경전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려 불교미술의 섬세함과 화려함의 극치, 사경변상도

불교미술 가운데 섬세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사경변상도. 이러한 사경변상도는 불교경전의 내용을 압축하여 섬세하고 정교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부처가 설한 진리를 담은 경전은 사람들에게 읽힐 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경전을 읽을 때 장차 무슨 내용을 말하려는 것인지 대강이라도 미리 알 수 있으면 한결 나을 것이다. 마침 이런 역할을 경(經) 변상도(變相圖)가 맡는다. 고려 때 주로 감지(紺紙)에 금니(金泥)나 은니(銀泥)로 제작한 많은 사경(寫經)에는 그 첫머리에 경전의 내용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변상도가 있다. 경전을 목판으로 새길 때에도 첫머리에 변상도를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의 나라, 고려는 불교의 힘으로 권력을 집중화할 수 있었지만 선불습합에 따라 불교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문화인 선도문화 기반 위에 불교의 교리를 받아드렸고 그 대표적인 것이 대웅전, 산신각(삼성각), 칠성각 등이 있다.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이었다. 고려에는 불교와 관련된 중요한 행사가 있었는데, '팔관회'와 '연등회'이다. 태조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전하는 10가지 유언 '훈요십조'에서도 팔관회와 연등회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였다.

'연등회'는 정월 대보름에 등불을 켜고 여러 음식을 차리고 춤과 노래로 나라와 왕실의 태평을 바라며 부처님을 섬기는 큰 행사였다. 성종 때 유학을 중시하는 많은 학자로 인해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고려시대의 거의 매년 열렸다. 2020년에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팔관회'는 하늘신과 산신 등 토속신에게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비는 행사였다. 팔관회도 연등회처럼 성종 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현종 때 다시 열렸는데, 송나라 상인들과 여진, 바다 건너 일본의 사절이 선물을 바치고 크게 무역을 하는 국제적인 행사였다.

고려시대 불교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도 호국불교로서 극복해 나가는 정신적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거란의 침입 때 불교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대장경 판본을 새겼는데, 거란이 스스로 물러갔다. 몽골이 침입했을 때도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사경변상도로 고려를 설계하다

고려시대는 불교미술이 화려하게 꽃핀 시대였다.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이 안정감과 비례감이 뛰어난 조각과 건축물이 주종을 이룬다면, 고려시대는 특히 불화와 사경변상도 등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사경은 신앙심을 돈독히 하고,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경전을 보급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권장됐던 불교수행의 한 방법이었다.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고려는 국가적 차원에서 사경원을 운영했다. 각 사찰과 귀족들도 왕실의 허가를 얻어 사경소를 만들었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경판인쇄본이 일반에까지 보급되자 차별화를 위해 최고급 종이에 금물과 은물로 소중한 부처의 말씀을 좀 더 귀하게 새기기 위함이었다. 사경승(寫經僧), 화승(畵僧)은 이들의 발원을 받아 물을 들인 고급 종이에 아교에 금박, 은박을 개어 경전을 쓰고 변상도를 그렸다.

이러한 사경변상도가 가장 많이 제작된 시기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말. 거란족과 몽골족 등 주변국의 침입이 잦고 무신정권이 집권한 이후 분분했던 국내 정세도 활발한 사경 제작의 한 배경이 되었다. 어느 때보다 국가의 질서와 평안, 조상의 극락왕생과 개인의 구복 등을 기원할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후기는 불교미술의 르네상스 시기로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 고려의 사경변상도가 널리 알려졌고, 불교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천추태후가 섭정을 했던 동안 고려는 전통이 부활하고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는 등 안정된 시기를 구가했다. 천추태후는 또한 대고구려 제국의 부활을 꿈꿨던 태조 왕건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고 그것은 서경 중시 정책으로 이어졌다. 천추태후는 안으로 고구려 영토 회복에 꿈을 키우면서 밖으로는 급변하는 동북아 국제 정세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실리외교를 통해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지만 천추태후의 정치이념은 당시 조정의 유학세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불만은 서서히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자유롭고 당당했던 한 여자로 고려의 운명을 짊어졌던 한 정치가로 당대 최고의 여걸로 살았던 천추태후, 그러나 유학자들과의 갈등 속에서 천추태후는 끝내 불륜의 대명사로 그려졌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승자가 쓴 역사 속에서 천추태후의 정치적 업적들은 모두 철저히 외면당했고, 남성 중심의 윤리와 유교 이념 속에서 윤리적이지 못하고 세속적인 왕후로 매도당했던 천추태후. 그러나 천추태후는 음탕한 여자도 권력에 눈이 먼 여자도 아니었다. 고려 전통의 부활을 통해 고려의 자주정신을 되살리고 유연한 외교 전략으로 외세의 침입으로 고려를 지켜낸 여성 정치가 천추태후, 그녀는 고려 오백 년을 통해 여성으로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을 행사한 고려 최고의 여걸이었다.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던 천추태후는 사경변상도로 고려를 디자인하였다. 사경변상도에는 부처의 가르침으로 개인의 완성을 통한 깨달음으로 홍익의 본성을 밝히고 전체의 완성을 통한 조화와 상생으로 불국정토를 건설하고자 했던 천추태후를 비롯한 고려인의 꿈이 담겨 있었다. 그 꿈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꿈으로 이어져 모두 하나 되는 정신문명을 다시 창조해야 할 것이다.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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