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순국선열추념탑 [자료 서울특별시]
서대문 순국선열추념탑 [자료 서울특별시]

11월17일은 무슨 날일까? 수능일, 즉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다. 그런데 수능일 말고도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바로 순국선열의 날이다.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찬탈당한 날인 11월 17일을 기억하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삼았다. 199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 정부 기관인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고 있다.

광무 9년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늑약(勒約)이란 억지로 맺은 조약을 말한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명목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것이었지만, 실질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식민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식민지에 준하는 통치와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때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와 유관순 열사 등 의사(義士)와 열사(烈士)들이 대거 나왔다.

의사(義士)와 열사(烈士)의 차이

그렇다면 김상옥 열사가 맞을까 아니면 김상옥 의사가 맞을까. 안중근 의사나 유관순 열사는 익히 들어 와서 잘못 사용된 경우가 거의 없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에 대해서는 잘못 사용된 경우가 많다. 물론 의사든 열사든 모두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독립유공자임에는 틀림없다.

국가보훈처의 정의에 따르면, 의사는 성패에 관계없이 목숨을 걸고 무력으로써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한 사람을 말하고, 열사는 직접적인 행동 대신 강력한 항의와 뜻을 목숨을 바쳐 자신의 굳은 의지로 내보인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공식적인 것은 아니고 사회통념상의 구분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의사와 열사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모두 독립유공자로 예우한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그리고 호국영령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해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보자. 1945년 8월 15일, 즉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날을 기준으로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반대하거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를 말한다.  애국지사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ㆍ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를 말한다. 여기서 지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이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투쟁하신 분들이다. 이때 지사는 생존한 이들에게도 붙일 수 있는 명칭이다.

호국영령은 국가를 위해 나라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로 6.25 전쟁에서 북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국군 장병들을 지칭한다. 넓은 의미로 순직한 경찰관이나 소방관 등도 호국영령에 해당한다.

대일항쟁의 역사와 인물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

대일항쟁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는 항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일항쟁’이란 일제지배하에 자유를 억압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하는 것에 대해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은 우리 민족을 이민족의 침략으로 부터 구출할 뿐만 아니라 일제지배하에서 빼앗겼던 자유와 인권 등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현재 우리가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독립 운동가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이다. 이들의 대일항쟁이란 숭고한 희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대일항쟁의 역사와 인물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안중근이 쏜 것은 대일항쟁의 신호탄

대일항쟁기에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던 수많은 인물들, 태어난 시간과 지역도 달랐고 활동 무대도 달랐으며 그 사상적 배경도 달랐지만 그들이 갖고 있었던 공통점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던 안중근을 존경하고 본받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누구인가? 우리 역사에서 대일항쟁의 서막을 열었고, 비록 1910년 경술국치를 막지는 못했지만 그를 기점으로 뜻있는 민족의 선각자들이 분연히 일어났고, 잠들어 있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으며, 단군의 건국이념이자 민족정신인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동양평화사상을 처음으로 현실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결국 그가 있었기에 기미년의 대일항쟁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광복군의 탄생으로 조직적인 대일항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며, 1945년 8월, 우리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그렇게 여명을 깨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한다. 환영인파 속에 남다른 두 사람, 한 사람은 막 기차에서 내렸던 이토 히로부미, 또 다른 한 사람은 안중근이었다.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대첩은 대일항쟁의 서막을 열었고, 10년 후 기미년 대일항쟁의 국민 봉기는 대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광복군의 탄생은 대일 승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김상옥 의사의 대일항쟁

영화 <암살>과 <밀정>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김상옥 의사는 대일항쟁기 시절 철물점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젖살도 안 빠진 여학생을 칼로 내리치는 왜경을 본 후 가진 모든 것을 처분하고 의열단이 있는 상하이로 망명한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목표 하나를 가지고 서울로 잠입했다. 그의 목표는 총독 사이토의 암살이었다. 하지만 밀고에 의해 총독 암살에 실패한 그는 많은 독립투사의 한이 서린 왜경의 본거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다. 결국 폭파에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20여 명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 당시 독립투사들의 숙적이었던 유도사범이자 악명 높은 형사부장 다무라를 저격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서울에 머물며 거사를 계획하던 그는 그를 잡기 위해 동원된 400여 명의 왜경에게 포위된다. 400:1의 상황, 그는 총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약 3시간 30분을 홀로 싸웠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선택.  그는 마지막 총알 한 발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자신에게 쏘았다. 온 몸에 열한 발의 총알을 맞는 그의 주검은 생전 직접 그린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이는 일본군 보고서에 기록된 영화같은 일이지만 불과 수십 년 전 현재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위에 벌어진 실화이다. 하지만 우리 기억 속에서 쓸쓸히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위해 죽어간 그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도산 안창호 그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도산 안창호가 “그녀 같은 사람 열 명만 있어도 조선은 독립됐다”고 했던 김마리아,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총알 세례를 퍼부은 후 죽어가면서 “2천만 동포들아! 분투하라, 쉬지 말라”고 외치던 나석주, 의병으로 전사한 남편의 뒤를 이어 독립군 수발에 나섰던 남자현 등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잊혀지고 있는 독립 운동가들이 너무나 많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하여

 광복 후 70여 년이 지난 오늘, 독립운동가 후손들 대부분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현행 ‘독립유공자 유족 예우에 관한 법률’은 손자녀 중 최연장자 1명만 보상금을 받도록 하고 있다. 유공자 1명당 평균 8명 정도의 손자녀가 있는데, 보상금 혜택이 골고루 돌아갈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독립유공자 가족 단체인 광복회는 ‘적은 액수라도 나눠 가질 수 있게’ 관련 법 개정을 요구해 왔지만, 번번이 입법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그 돈 없이도 열심히 사는 후손들도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후손들에게 보상금은 단순한 돈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가난에서 비롯된 심리적 박탈감을 메우고, 후손들이 선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보상 규정은 후손들의 가족 분란을 만들고 선대의 훌륭한 헌신을 원망할 여지가 있다. 가산을 탕진하며 우리에게 ‘조국 독립’ 이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물려준 자랑스러운 독립 유공자, 그들의 희생으로 이룬 독립은 우리 모두 누리고 있는데, 정작 우리 사회는 그들 자손의 경제적 어려움을 외면하는 셈이다.

지난달에 처음으로 관공서에 민원을 넣었다는 군대 동기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민원을 넣은 후 답답한 심정으로 군대 동기 단톡방에 관련 내용을 올린 것이다. 군대 동기 어머님께서 독립유공자의 딸로서 현재 경기도로부터 받은 무료진료증을 가지고 있는데, 얼마 전 집안에서의 낙상 사고로 고관절 수술을 받고 경기도 모처에 있는 병원에 입원중이셨다고 한다.

병원 입원비를 중간 정산하는 과정에서 경기도에서 입원비를 독립유공자 유족 중 수권자에게 지원한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할아버지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은 입원비 지원이 아니라 입원비 중 다인 병실료 기준으로 최대 12일치만 지원 받는다는 사실을 병원 원무과 직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경기도청 보훈 담당자와 전화 통화한 결과, 조례가 통과되어 독립유공자 유족에게 지정병원에서의 입원비를 지원하게 되었다는 신문기사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인실 병실료는 약 2만원 정도로 12일치면 24만원에 불과하다. 그런데 경기도는 이것을 부풀려 마치 입원비의 전부를 지원해주는 것처럼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제공하여 그와 같은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독립운동이 주목받는 기념일이 되면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도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그때뿐인 것 같다.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다시 생각해 본다. 오늘을 있게 했지만 오늘이 잊고 있었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그리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이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자의 도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