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큰 강에서 놀던 개구리 한 마리가 어느 날 어느 우물가에 가게 되었다. 우물 속으로 들어간 큰 강 개구리는 우물 안 토박이 개구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큰 강 개구리 : “나는 아주 큰 강에서 왔소.”

우물 안 개구리 : “큰 강이라? 큰 강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큰 강 개구리 : “그건 말로 설명하기가 난감하지만 한번 설명해 보겠소.

우물은 큰 강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오.”

우물 안 개구리 : 껄껄껄 웃으며 “이 우물보다 더 큰 게 있다는 소리는 내가 살아생전에 들어보질 못했소. 그래, 그 큰 강이라는 것이 얼마나 크다는 거요?”

우물 안 개구리 : 우물 안 넓이의 한 삼분의 이쯤 펄쩍뛰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만큼 되오? 우리 우물은 이렇게 넓단 말이오.“

큰 강 개구리 : “아니오.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 하오. 그건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요. 아주 광대하고 경계도 없소.”

우물 안 개구리 : 화를 내며 말하기를, “당신은 정말 미쳤거나 새빨간 거짓말쟁이가 틀림 없소. 여기서 썩 꺼지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다니.”

위 예화에 등장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도 답답하지만 큰 강 개구리가 더 답답한 것은 왜일까? 우리는 인생에서 두 유형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고집불통의 앞뒤가 막힌 사람도 답답하지만 본인이 아는 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진실이 왜곡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사람 또한 답답하다.

그렇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와 큰 강 개구리 중 양자택일 하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될까? 아니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나 큰 강 개구리 모두 자기 세계에 빠져 있다.

우물 안을 우주로 만들 수 있다면

여기서 의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바로 우물 안을 우주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우물 안 개구리가 큰 강 개구리를 부러워할까? 또 큰 강에 놀던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잘난 체를 할 수 있을까?

정리하면 우물 안의 개구리는 의식이 작은 존재를 말하고 의식이 확장되면 우물 안에서 우주가 끝없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문제이고 깨닫고 나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끝없이 펼쳐진 우주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주에 대한 시대별 관념 추이를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의식구조 상 우주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안다면 우물 안을 우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삼족오를 통해서 본 고구려인의 우주관

고구려 시대의 우주관을 보여주는 삼족오, 바로 새의 머리는 홀로 영원하신 하느님이고 세 개의 다리는 천지인을 상징한다. 하나는 셋이 되고, 셋은 하나가 된다는 우주의 법칙을 디자인한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고조선의 땅과 정신을 다물려 받는 것을 국시로 삼았다. 삼족오는 북방 민족의 상징이었다. 본래 북방민족들에게는 조류에 대한 신앙이 있다. 새는 하늘과 땅을 오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늘을 딛고 살지만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 새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존재이다. 하늘의 뜻을 인간에 전하는 신성한 존재라고 믿었던 것이다.

첨성대를 통해서 본 신라인의 우주관

옛날에는 별을 관측하는 게 국가 대사였다. 별이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나라의 길흉을 점치거나 별의 운행을 보고 달력을 만들었다. 별을 보기 위한 높은 대(臺), 즉 첨성대(瞻星臺)를 세운 이유다. 고구려 평양성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신라 첨성대는 경주에 보존돼 있다. 국보 제31호다. 7세기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현존 실물과 일치한다. 동양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꼽힌다.

첨성대는 정사각형의 이중 기단 위에 원주형으로 27단을 쌓아올린 뒤 꼭대기에 우물 정(井) 자 모양의 정자석 2단을 엮어놓은 구조다. 기단이 사각형이고 몸체는 원으로 돼 있는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이라는 신라인의 우주관이 반영됐다. 중간에 남쪽으로 네모난 출입구가 있는데, 그 아래에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있다. 신라인의 우주에 대한 꿈이 첨성대를 만들었다. 우주 우물이며 1,300년 이상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벽돌에 새겨진 백제인의 우주관

백제인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이라면 1993년 출토된 금동대향로와 부여 외리 문양전이 있다. 부여 외리 문양전은 1937년 부여 규암면 외리에 사는 농부가 보리밭에서 나무뿌리를 캐다가 무늬가 새겨진 사각형의 전돌과 와당을 다수 발견하였다. 무늬 전돌의 도상을 보면 연화, 와운, 반룡, 봉황 무늬는 원형, 봉황산수, 산수인물, 연대귀형, 산수귀형은 사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고대 동아시아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석관 덮개에 새겨진 고려인의 우주관

사신문 석관은 고려인의 내세관과 우주관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사신 문양이 측면에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빼어난 유물이다. 석관 뚜껑 바깥에는 비천과 꽃을, 안쪽에는 카시오페이아와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다.

천자문을 통해 배우는 조선인의 우주관

조선시대 아이들이 서당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첫 글자는 하늘천(天), 두 번째 글자는 따지(地), 그것을 읽는 아이는 사람임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이것이 바로 천지인(天地人)이다. 그 다음 나오는 글자가 검을현(玄)과 누를황(黃)이다. 처음 등장하는 여덟 글자들을 조합하면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이 된다.

이처럼 천자문의 첫 구절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 거칠다’는 우주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통상의 하늘색은 파랗지만, 천자문에선 하늘의 색이 검다고 적시하고 있다. 천자문이 지어진 것은 약 1500년 전.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은 햇빛의 산란에 따른 착시에 불과할 뿐 대기권 밖 하늘은 검다는 사실을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옛 성현들의 넓고 깊은 우주관이 놀랍기만 하다.

우주를 향한 오늘의 도전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4%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는 지구와 지구에서 관측되는 1조 개의 은하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보통물질을 제외한 나머지는 암흑물질(27%)과 암흑에너지(69%)로 구성돼 있다. 아직 인류가 모르는 영역이다.

한국은 올 들어 6월 말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한 데 이어 지난 12월 5일에는 달 궤도선 ‘다누리호’까지 전이궤도에 올리면서 드넓은 우주 개발의 발판을 마련했다. 동시에 우주 암흑물질을 규명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연구에도 나섰다. 올해는 우주를 향한 도전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물 안을 우주로 만들 수 있는 원리와 방법

고대부터 현재까지 우주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고,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우주는 우리 눈 앞에 항상 있었다. 이러한 우주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우주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의식은 크게 확장될 것이다.

최근 유튜브에 공개한 공생 다큐 총 3부작 중 2부 <영성과 과학편> 에 우물 안을 우주로 만들 수 있는 원리와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 이후로 20세기 혁신적인 양자물리학자들의 과학적 성취 덕에 인류는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의 과학은 홀로그래피 이론(우주에는 다양한 차원이 존재하고 각 차원의 시공간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의 결과도 달라진다는 이론)으로 우주는 부분으로 분리될 수 없는 전체로 존재하고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양자역학으로 시작된 현대물리학은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신과학’ 이르러서는 마음과 정신 또는 의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고 있다. 이들은 의식과 물질이 분리되지 않은 유기적 관계라는 분명한 관점을 갖고 있다.

시간과 공간, 즉 환경은 내가 만들어낸 산물이자 마음의 반영이 될 수 있다. 우주의 에너지와 모든 요소들은 우리가 사는 동안 만들어내는 의식적인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 마음과 우주 모두는 파동과 입자로 이루어진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우주에 가능성의 에너지로 가득한 필드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 무한한 에너지장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에 접속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마음과 뇌를 활용하는 데에 있다. 우주는 거대한 파동에너지로 존재한다. 우리의 마음과 뇌의 의식 역시 파동에너지로 존재한다. 잘 알려져 있듯 하나의 파동은 그 파동과 유사한 주파수의 파동과 공명을 일으킨다. 우리의 마음이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장과 연결될 때 그 필드 안의 유사한 정보는 공명을 일으키게 되고 여기서 끌어당김의 현상이 만들어진다.

깊이 집중된 마음, 즉 뇌의 각 구조별 통합이 이루어 졌을 때 신피질의 생각 뇌와 구피질의 감정 뇌, 뇌간의 본능 뇌는 하나로 통합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때에도 생각은 행동으로 실행하는 힘이 극대화되는 에너지 상태가 된다. 우리의 마음과 뇌가 시공간을 뛰어 넘은 무의식 상태에 이르면 우리는 마침내 우주의 광대한 에너지장에 접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화를 이끌어내는 명상의 기술이고, 마음과 뇌의 활용법이다.

매일 똑같은 마음과 습관적인 패턴으로 삶을 대할 때 현실은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기대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은 선택해야 되고 주의 깊게 집중하여 뇌의 각 구조별 기능이 통합될 때 마침내 현실이 된다. 마음에는 경계도 없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없다.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우주의 관계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구분이 없다. 모든 생명은 허공에서 시작되어 허공으로 돌아가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에너지장의 바다에는 인류의 모든 역사를 망라하는 우주적 청사진이 들어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단위들은 그것이 미립자이든 아니면 더 작은 아원자라고 할지라도 각각 쪼개어 고립된 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른 개체와 관계를 맺고 에너지장을 형성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우주는 거시적이고 역동적인 상호 연결망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깨달음은 큰 파워를 갖지만 이것이 집단적인 장을 형성하고 행동과 창조로 현실화될 때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인간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한 마음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너와 나를 분리하고 경쟁과 이기심의 높은 장벽에 가려 본래의 밝은 본성을 찾지 못할 때 인류의식은 공멸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

일묘연만왕만래용변부동본 본심본태양앙명인중천지일

이렇게 하나가 묘하게 피어나 우주 만물이 만들어지며 그 쓰임은 무수히 변하나 근본은 다함이 없다. 마음의 근본과 우주 만물의 근본이 하나로 통할 때 일체가 밝아지니 마음을 밝힌 사람들에게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들어가 있다. < 한민족의 경전 ‘천부경(天符經)’ 중 >

우리의 마음이 창조한 세계가 우주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우주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저 미지의 세계이고 신비의 세계만은 아닌지 오래다. 우주를 탐험하고 우주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주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고대인들이 창조한 세상, 또 그들이 바라보았던 우주, 수천 년 전의 고대인들이 이 땅에 정착한 이래로 역사와 문화의 발전을 이루어 왔다.

수백 년, 수천 년 뒤의 후손들을 생각하며 고대인들이 바라본 우주는 어떤 우주이었을까? 아마도 후손들이 바라 볼 우주가 더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지금의 문화를 창조해낸 동기였다. 오래 전에 살았던 고대인들도, 오늘은 사는 현대인들도 모두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우주를 물려주고자 하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앞으로 다가 올 미래를 생각하며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고대인들도, 현대인들도 매일 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다짐할 것이다. 수백, 수천 년 뒤의 이름 모를 후손들까지도 우리가 보는 아름다운 우주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 또한 K스피릿, 즉 홍익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창조한 세계가 우주다. 우리의 의식이 미치는 세계가 바로 우주인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도 자기 안의 우주를 볼 수 있다면 그 우물 안은 이미 우주처럼 끝없이 펼쳐진 공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우물 안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깨닫는 다면 우리의 일상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