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계묘년, 토끼의 해이다. 우리 옛날이야기에는 유난히 토끼가 많이 등장한다. 특이한 것은 토끼가 나올 때는 호랑이가 그 상대로 등장한다. 토끼는 지혜로워서 힘은 세지만 아둔한 호랑이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줄 안다. 하지만 현실과 이야기 속의 토끼는 간극이 좀 크다. 현실에서는 ‘큰 귀’와 ‘토끼는’ 실력으로 생존해 나가고 있다. 호랑이에게 결코 적수가 안 되는 토끼지만 매번 위기 상황에서 재치 있게 빠져나간다. <이묘봉인도(二卯奉寅圖)> 라는 민화에는 한 마리의 호랑이와 두 마리의 토끼가 등장하는데, 토끼가 호랑이의 담배 시중을 들고 있다. 이때 토끼는 결코 호랑이와 대적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공생을 선택하였으며, 공생을 선택한 결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2023년을 공생의 해로 만들려면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잊지 않고 보답해야 한다. 그것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고 죄의식 없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길이다.

장군의 귀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다

2021년 8월 15일, 오랜 기다림 끝에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여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일명 ‘장군의 귀환’이 이루어졌다. 장군의 서거 78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장군의 귀환이 늦어진 이유에는 역사적 아픔이 있었다. 2023년의 시작, 1월을 맞이하면서 오늘을 있게 했지만 오늘이 잊은 대일항쟁역사의 명암을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뒤늦은 장군의 귀환으로 다시 한 번 대한민국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으면 한다. 단순히 역사적 아픔만을 일깨우기 위함이 아니라 역사적 아픔을 딛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대일항쟁 역사의 빛과 그림자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28년 전에 일어난 1895년 을미년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후 홍범도는 호랑이 잡는 사냥꾼이 아니라 왜놈 잡는 사냥꾼이 되기로 한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포수 68명이 모였다. 당시 홍범도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들이 바로 산포수 의병대였다. 홍범도 대장이 이끄는 산포수 의병대의 활동 무대는 한반도의 최고봉, 백두산을 비롯한 함경도 전체였다. 1년 동안 60전 60승, 의병계의 불패신화를 창조하였다.

1919년 3월 1일, 만주에서도 뜨거운 만세운동의 여파로 의병들을 군대조직으로 재편, 이름하여 대한독립군이 탄생한다. 이때 홍범도의 나이는 52세였다. 국경 근처로 집결한 독립군 부대들은 불패신화를 이어가기 위해서 호랑이 사냥하듯 1920년 6월 4일 새벽 두만강 독립군 대원들이 은밀하게 강을 건넜다. 국경 근처 일본군 소대를 기습하였고, 공격에 놀란 일본군이 떼로 몰려왔다.

다시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은 호랑이를 몰듯이 일본군을 유인하였다. 다음 날 밤 11시 일본군 정예부대가 출격했다. 바로 월강추격대로서 두만강을 건너서 독립군을 소탕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3위의 군사력을 가진 일본, 기관총, 장총, 대포까지 신형 무기로 풀 세팅하였다. 어느덧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에 다다른 일본군, 두만강 끝자락에 있는 봉오동은 특이한 지형, 즉 조롱박처럼 생겼다. 입구에 기다란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를 따라서 안으로 쭉 들어오면 높은 산이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독립군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독립군 700명 가량이 숨어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을 여기로 유인하면 되는 거였다. 독립군 선발대가 골짜기 입구에서 일본군을 맞았다.

봉오골 입구에서 25리, 즉 10km 떨어진 지점까지 들어왔다. 어느새 새벽은 아침이 되고 나무 수풀 사이로 독립군의 총구가 스윽 모습을 드러낸다. 다들 숨죽이고 홍범도 대장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홍범도 대장의 신호탄과 함께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일제히 사격에 나선 독립군과 삼면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정신 못 차리는 일본군, 결국 일본군은 후퇴를 결정한다. 이것은 독립군의 첫 번째 대승리였다.

대패한 일본군은 악에 받쳐 결국 간도 지방에 있던 조선인들을 총으로, 창으로 보이는 대로 살해했다. 이것이 간도참변이다. 이후 독립군도 흩어지고 홍범도 장군도 자취를 감췄다.

1년 후 1922년,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있는 홍범도 장군이 발견되었다. 이 장소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지역민족대회에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참석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하여 만주 조선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이는 러시아에서 갈 곳도 없고 하니 러시아로 와서 혁명군을 도와 달라는 요청했고, 러시아가 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독립군을 지원하기로 한 러시아가 약속을 어겼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들은 군복을 벗고 농부가 되었다. 일본의 핍박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 고생 끝에 척박한 땅을 농지로 만들었다.

고려인 1세대, 그들의 중심에는 홍범도 장군이 있었다. 1937년, 3일 후 고려인을 태울 기차가 도착했다. 고려인들은 전부 열차에 타라고 했다. 무려 40일 동안 고려인을 태운 기차는 달렸다. 그것은 지옥 열차였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카자흐스탄으로 6,000km 떨어진 곳으로 강제로 이주시킨 것이다. 그 이유가 너무나 황당했다. 고려인들이 일본인과 닮아서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만으로 약 17만 명의 고려인이 척박한 땅으로 강제 이주한 것이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이었다.

홍범도 동무를 곡하노라

얼마 후 신문에 부고 기사가 실렸다. ‘홍범도 동무를 곡하노라’, “홍범도 동무가 여러 달 동안 숙환으로 집에서 신음하시다가 75세를 일기로 1943년 10월 25일 세상을 떠나시었다.”

조국의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한 채 타국에서 순국하시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은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된다면 꼭 나를 조국에 데려다 달라”고 하셨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홍범도 장군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이 공산주의 사회였던 것이다.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반공주의에 의해 금기시하는 그런 것들이 홍범도 장군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으니까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빨갱이 프레임을 만들었고 결국 늦게 부각되게 되었다. 나라가 독립은 되었지만 분단되면서 생긴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장군의 귀환을 기다리다

2021년 78년 만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시게 되었다. 바로 장군의 귀환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공군이 홍범도 장군이 유해를 실은 비행기를 호위하게 되면서 한 인사말이 인상적이었다.

대한민국 공군 :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78년 만에 이루어진 영웅의 귀환, 대한민국은 늦었지만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장군의 고단한 삶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또 다른 장군의 귀환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바로 대일항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안중근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 와야 한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아직 그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효창공원에는 안중근 장군의 가묘만 있을 뿐이다. 일본은 안중근 장군의 시신을 여순감옥 공동묘지에 몰래 묻었다. 그의 죽음이 조선에서 신격화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신격화되어 있었다. 그 뒤로 제2의 안중근, 제3의 안중근이 계속 나왔다. 그렇게 왕조는 사라졌고,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사대부들 역시 포기한 나라를 이 땅 곳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 이름 한 줄 남기는 것조차 꺼렸던 아무개들이 저항하고 항거함으로써 그 빛나는 얼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다시 맞이하는 새해,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희망의 불씨를 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