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첫 소절이다. 한때는 한국인이라면 이 가사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가곡 <선구자>는 1절만 윤해영 작사이고, 2·3절은 후에 작곡자 조두남이 작사했다고 한다. 1절이 자주 불려서 2·3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 였다. 1980년대까지는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 때문에 만주, 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리하여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나 곡 모두 훌륭한 가곡으로 평가되었으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가곡으로 매번 선정될 정도였다.
지금은 작사가, 작곡가 모두 친일 행적 논란에 휘말리는 바람에 외면 받는다. 가곡 <선구자>의 가사 ‘일송정 푸른 솔’ 중 ‘일송정’은 대일항쟁의 구심으로 단군민족주의를 제시하고 실질적으로 대일항쟁을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 대한독립군단 백포 서일 총재를 비롯한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을 상징한다.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에 있는 ‘일송정’은 대일항쟁의 역사와 정신이 깃든 곳으로 독립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었다. ‘일송정’은 원래 정자 모양의 소나무였는데, 일제가 1938년 고사 하였다. 1991년 그 자리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를 다시 심었다.
청산리 독립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는 가곡 <선구자>를 들으면 가슴 뜨거워지던 시기인 1983년에 개봉된 영화 <일송정 푸른솔은(부제 : 청산리 독립 전쟁)> 이다. 이장호 감독, 배우 진유영, 윤양하, 김운하, 이보희 주연의 청산리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주요 줄거리는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애국 청년들은 치욕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북로군정서’라는 독립단체를 결성하고, 김좌진 장군을 비롯하여 이범석, 나중조 등의 투사들은 민족혼에 불타고 있었다. 한편 만주까지 정복한 일제는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해 만주의 비적 장작림을 포섭하는 등 독립군을 몰아내려는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을 필두로 청산리에서 대혈전을 벌였고, 수십 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은 대승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청산리대첩을 다루었던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의 한 장면이다.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은 단연 김좌진 장군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좌진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좌진 : “그 동안 7개월에 걸쳐 블라디보스톡에서 무기구입에 전력투구하신 우리 군정서 총재 각하를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김좌진 장군보다 높은 서열인 총재 각하가 등장한다. 이 사람이 바로 대한군정서 총재인 백포 서일이다. 영화감독이었던 이장호는 이렇게 말했다.
이장호 : “그 당시 김좌진 장군의 부대에는 서일이 최고 지도부였어요.”
백포 서일은 누구인가?
백포 서일은 이천 서씨로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일항쟁 운동가이자 종교인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기관의 총사령관이자 총재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실질적으로 승리로 이끌어 청산리 대첩이라는 대일전쟁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신 분이시기도 하다. 그런 분이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지청천 장군 등에 가려 그 빛을 보지 못하였다. 네 분의 뛰어난 장군들을 거느리고 대일전쟁의 지휘관이었고 대일항쟁의 정신적 지주였다. 대종교인으로서 대종교의 철학ㆍ사상 기반을 만들었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역사에 눈을 떠 ‘대한민국’의 ‘한’의 의미를 정립하기도 하였다. 백포 서일은 ‘한’의 근원을‘단군’으로 보았고, 단군의 역사가 곧 ‘한’의 역사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서일의 호는 백포, 본관은 이천이었다. 열일곱 살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경성의 함일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21세에 졸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귀의, 국내에서 활약하다가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단체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이 때 나이 30세였으니 김좌진 보다는 8세 위였다. 그 뒤 대종교를 포교하면서 북간도 일대에서 명망을 얻었다.
서일과 김좌진, 두 거목의 만남
서일과 김좌진, 두 장군의 만남은 청산리대첩이라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3.1항쟁이 일어나자 그 해 8월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군정부는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보내준 군자금을 기금으로 하여 1,500명에 달하는 독립군을 보유하였다. 서일은 또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우수한 교관을 물색하던 중 김좌진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김좌진은 사관양성소 소장이었다. 사관양성소는 오늘날의 사관학교이다. 김좌진 장군은 오늘날의 사관학교 교장이었고, 그 사관학교를 설립한 인물이 바로 백포 서일이었다. 서일은 삼일항쟁을 겪으면서 비폭력으로는 독립을 할 수 없고 오로지 무력만이 자주 독립이 가능하다고 판단, 군대를 설립하고 뛰어난 군인 양성을 위하여 사관양성소도 설립한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하늘이 시킨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일 없이 김좌진 없고, 김좌진 없이 서일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빛나는 항일 무장투쟁의 별
3.1항쟁이 일어나고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일의 '군정부'란 이름이 마치 또 하나의 정부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여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동시에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북로군정서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짝을 이루어 간도 독립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서일이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빛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일항쟁의 최선봉이었던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서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지청천 등 대일전쟁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장군들을 통솔했던 실질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군이 대종교 신자였다. 서일은 대종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독립단체를 이끌다가 대한군정서, 북로군정서 등의 수장을 거친 뒤 통합독립군인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를 맡았다. 대한독립군단이 와해되자 자신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말한 뒤 대종교 최고 수련 경지였던 폐식호흡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권력만 가지면 책임지지 않는 이 시대 정치권과 사회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지청천 등의 명성에 비해 서일 장군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어 있다. 다음은 그의 마지막 어록이다.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백포 서일의 한민족주의
100년 전 백포 서일은 역사는 안보이며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 했다. 그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단군사상을 연구했다. 그 정신은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 전투 등 대일항쟁으로 이어졌다. 서일은 “왜 우리가 일본에게 압제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나?”라고 질문했을 때 가장 큰 이유가 사대주의였다고 본 것이다. 사대주의를 벗어나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했고, 그래서 그는 단군조선의 역사를 강조했다. 그리고 홍익인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3.1독립선언서와 무오독립선언서를 비교해 보면 그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건 3.1항쟁에서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 33인은 이후 일부 변절했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일본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과정이 힘들겠지만 단군대황조가 보살펴준다는 대목이 나온다. 서일의 제자인 윤세복, 김좌진 등이 서명했다. 이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주축 세력이 된다. 나철은 무장투쟁을 하지 말자고 했다. 서일은 나철이 죽자마자 무장투쟁으로 돌아선다. 일본이 총칼을 들고 오는데 우리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 운동을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나철은 대종교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반면에 서일은 현실주의자였다. 서일의 판단이 옳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20세기 리더 국가로서 한민족주의를 제안했다. 대한제국이 1897년에 성립되었고, 그때 단군이 조명되었다.
근대 최대의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군조선을 근간으로 하는 한민족주의였다. 백포 서일은 한민족주의의 이론적 틀을 확립하고, 그 이론을 행동으로 옮겼다. 당시 암울했던 대일항쟁에 그 길을 열었던 지도자였다.
이제 한국은 세계로 나가야 할 때이다. 그럴 때 한국 고유의 사상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일본은 세계화를 하면서 천황주의를 하다가 실패하였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을 설파하면서 세계화에 성공하였다. 우리는 상생이라는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로 세계화를 한다면 충분히 성공할 것이라고 본다. 이 상생의 이념을 확립한 분이 바로 서일이었다.
독립군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영화 서두에 중국 마적에게 붙잡혔다가 김좌진 장군의 도움으로 풀려난 3명이 나온다.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농사꾼으로 나오는 사내는 일상의 편안함을 부끄럽게 여긴다. 갑산면옥에서 국수를 파는 여인은 남편의 친일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같이 죽기 위해 양잿물을 먹었지만 살아났다고 한다. 성씨가 김가인 사내아이는 홍범도 장군이 아버지라고 끝까지 우긴다. 1920년대 일제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간도지역으로 이주해 온 조선인들의 삶과 그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1920년 7월 9일 노령으로부터 최초의 무기가 도착하였고, 전쟁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이때 사령관 김좌진 장군 등장한다.
무기 운반대로 징모되어 연해주(블라디보스톡)로 떠나게 된 한 농부(조갑석)의 집에서 떠나기 전 날, 농부와 농부의 아내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독립군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지키는 모든 농부가 독립군임을 알 수 있다.
농부(조갑석) : “나로서는 참 좋은 기회요. 마침 금년 메밀 농사는 다 끝난 셈이고, 추수야 아직 아버님이 근력도 계시고 하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오.”
농부의 아내 : “열흘 정도면 이번 일에 징모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다니 그때는 돌아올 수 있잖아요.”
농부(조갑석) : “이 산골에서 겨울에는 딱히 할 일도 없소. 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농사 꾼이었지만 모두 뜻 높은 분이었소. 때가 되면 병기를 들고 나가 싸우셨 소. 이제 내 차례요. 내 대에 와서 선영에 욕보일 수는 없잖소.”
중국 동북3성은 마적 출신 장작림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일본이 우리 독립군을 만주 땅에서 없애 버리라고 압력을 가하는 상황이었으며, 무기 운반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관양성소 1회 필업식(졸업식)을 앞두고 중국군과 충돌하게 되었으니 사령부로서는 위기상황이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이 단군영정, 홍암 나철, 백포 서일 총재 사진을 걸어 놓고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좌진 장군이 대종교 교도임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대일항쟁 역사에서 최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
1920년 10월 21일 새벽 5시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를 했는데, 모두 승리하였다. 이것을 두고 ‘청산리대첩’이라고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동네 부녀자들이 먹을 것을 머리에 이고 전장에 뛰어 들어 독립군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독립군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인상적인 장면은 전장에 사물놀이패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적군을 교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동네의 부녀자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총알이 날아오는 전장에 들어가 직접 독립군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 주거나 직접 먹여 주었다. 다음은 청산리 전투 생존자 이우석 옹이 남긴 증언이다.
"그때 엄호를 맡았던 동지들은 모두 전사했거나 실족을 했어요. 이제 나도 멀지 않아 저 세상으로 가겠죠. 그런데 이 늙은이 죽기 전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어요. 나라가 반쪽으로 갈라졌단 말이에요. 요즈음 젊은이들은 그래도 마음이 편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이 반평생을 남의 땅에서 고생한 사람들은 그게 자꾸 서럽단 말이에요. 우리 후손들 모두 똑똑하고 능력도 많은데, 어서 이 나라, 한 나라로 합쳐질 수 있도록 힘 좀 써 봐요."
진정한 일송정 푸른 솔은
이 영화를 통해 독립군을 처음 보았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켜 왔는지를 알 수 있었고 일제의 잔학성 또한 알 수 있었다. 영화에서 배우 박암이 서일 총재 역할을 했다. 또한 배우 김기주가 김좌진 장군 역을 했다.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백포 서일 총재를 조명한 책, <항일무장투쟁의 별,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이 최근에 나와 백포 서일에 관해서 알려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잘 모르는 한국인들이 많은 것 같다. 서일 총재의 호는 백포(白圃), 김좌진 장군의 호는 백야(白冶) 이다. 두 분의 호를 보면 두 분의 관계를 헤아려 볼 수 있다. 백포(白圃)는 밝은 농부이고, 백야(白冶)는 밝은 대장장이이다. 농부에게 필요한 농기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 대장장이라면 서일 총재와 김좌진 장군의 관계가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청산리 독립 전쟁에서 서일과 김좌진, 두 거목이 존재했고, 그 외의 많은 독립군들, 음식을 나눠 준 여성들, 사기를 북돋아 주었던 풍물패 등 당시 청산리에 존재했던 모든 조선 동포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진정한 '일송정 푸른 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