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의사 의거를 알리는 카드뉴스(한국어)  [이미지 서경덕]
김상옥 의사 의거를 알리는 카드뉴스(한국어) [이미지 서경덕]

김상옥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한국 알림이' 서경덕 성신여자대학교 교수가 김상옥 의거를 국내외에 알리는 '한국사 지식 캠페인'을 펼친다고 1월 12일 밝혔다.

감상옥(金相玉)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이번 카드뉴스는 총 4장으로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제작했다.

카드뉴스는 1923년 1월 12일 의열단원 김상옥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일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펼쳤다고 소개했다.

또한 의거 이후 10여 일간 은신하던 김상옥은 1월 22일 일제 경찰수색대와 교전 중 탄환이 모두 소모되자, 항복을 권유하는 일제 경찰을 꾸짖으며 남은 한 발로 자결한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

김상옥 의사는 1889년 서울 동대문 효제동에서 아버지 김귀현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4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20세때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이전부터 종사하던 철물공장을 설립하여 이윤을 분배하였던 그는 또 이종소(李鍾韶)·임용호(任龍鎬)·손정도(孫貞道) 등과 사회계몽·민족독립 등을 의논하고 실행하였다.

그리하여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고 금주·단연운동을 크게 전개하며 말총모자공장을 설치하고 국산모자의 생산·보급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윤익중(尹益重)·신화수(申華秀)·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적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직접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타개해 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그해 8월에는 미국 의원단 일행이 서울에 들어오는 기회를 이용하여 한우석(韓禹錫) 등과 함께 의원단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하차하기를 기다려 시위와 총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에 일부 동지들이 붙잡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그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와 소개로 중국의 지사들과 교유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安弘翰)·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였다.

이때 그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 통하여 서울에 있던 의열단원 김한(金翰)과의 연락 협력을 당부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연락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후 일경을 피해 10여일간 은신하다가 1월 22일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순국 후 1924년 상해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전(傳)을 지어 간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번 캠페인을 기획한 서 교수는 "올해부터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소개할 예정이며, 영어로도 함께 제작해 해외에도 꾸준히 알려 나갈 계획이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전 세계 주요 한인 및 유학생 커뮤니티에도 카드뉴스를 공유해 재외동포 3~4세에게도 한국사를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사 지식 캠페인'은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날에 맞춰 한국사 지식을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카드뉴스로 제작해 SNS 상에서 널리 전파하는 대국민 역사교육 프로젝트다.

한편 서경덕 교수는 지금까지 다국어 영상과 카드뉴스를 통해 안중근, 안창호, 유관순, 전형필, 주시경, 조명하, 정세권 등 수 많은 독립운동가를 국내외에 꾸준히 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