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군경과 교전하던 중 순국한 김상옥 의사를 기리는 〈일대 천 항일 서울시가전 승리 100주년 기념식〉이 1월 31일(화)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회장 윤홍근)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윤홍근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해 기념사업회 회원, 독립유공자 유족 등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약전봉독, 의거 이유 낭독, 기념사, 축하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는 1월 31일 김상옥 의사를 기리는 '일대 천 항일 서울시가전 승리 100주년 기념식'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개최한다. [이미지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인스타그램]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는 1월 31일 김상옥 의사를 기리는 '일대 천 항일 서울시가전 승리 100주년 기념식'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개최한다. [이미지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인스타그램]

 

1890년 서울 출생인 김상옥 의사는 20세에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는 등 사회계몽ㆍ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윤익중(尹益重), 신화수(申華秀), 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 의열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계획하였고,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20년 10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김구ㆍ이시영ㆍ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의지를 키웠다. 또한 진과부(陳果夫)를 비롯한 장개석 총통(蔣介石 總統)의 국민당 정부 고위 인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적대자들로부터 임시정부를 옹호했다.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오권헌법(五權憲法),《조선혁명선언급한살임정강(朝鮮革命宣言及韓薩任政綱) 등 많은 독서와 사격연습을 하며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

1922년 4월 김상옥 의사는 상해에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으로 선임되었다. 한당은 조소앙이 창설한 ‘한살림당(韓薩任黨)’을 말한다.

김상옥이 조소앙과 인류평등, 세계 대동(大同) 등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렇게 길게 칩거하면서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앉아서 탄식하기보다는 움직이며 때를 만드는 것이 낫겠다”고 하자 조소앙은 이 직책을 주면서 국내에 들어가 뜻을 실현하도록 격려했다.

김상옥 의사는 상해를 떠날 결심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있습니다. 만약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다음 세상에서 서로 만납시다. 나는 차라리 뜻을 깨끗하게 지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 않겠습니다.”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ㆍ권총ㆍ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안홍한(安弘翰), 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인 1923년 1월 12일 밤, 일제 식민통치의 근간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1,000여 명의 일본 군경에 홀로 맞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뒤, 1월 22일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총탄으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을 기꺼이 걸으셨던 김상옥 의사님의 의로운 생애는 100년의 긴 세월을 넘어, 여전히 우리 후손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면서 “정부는 의사님을 비롯해 조국을 위해 소중한 청춘과 목숨을 바치신 분들께 ‘일류보훈’으로 보답하고, 우리 국민이 그 숭고한 정신을 언제나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