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 제104주년 기념식’이 8일(수) 오전 11시 일본 도쿄 재일본한국와이엠시에이(YMCA)회관에서 재일본한국와이엠시에이(YMCA, 이사장 정순엽) 주관으로 개최된다고 밝혔다.

이날 기념식에는 정부대표인 장정교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을 비롯해 광복회원, 유학생 대표, 재일본 한국청년회 회원 등 150여 명이 참석한다.

1919년 2월 8일 재일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한 재일 조선기독청년회관. [사진 국가보훈처]
1919년 2월 8일 재일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한 재일 조선기독청년회관. [사진 국가보훈처]

기념식은 동경한국학교합창단의 ‘2.8독립선언의 노래’ 합창, 기념사(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 장정교, 주일본국대한민국대사관 총영사 배경택), 2.8독립선언낭독(재일한국유학생연합회 회장 박재현),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된다.

‘2·8독립선언’은 재일 한인유학생들이 임시로 결성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최팔용, 송계백, 김도연, 김상덕 선생 등 11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고, 재일 한인유학생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도쿄) 한복판에서 조국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사건이다.

1918년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영자신문(The Japan Advertiser)에 <한국인들의 독립주장」(1918.12.15.)>,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1918.12.18.) 두 편이 게재됐다.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재일유학생들은 한국독립운동의 적기로 판단하고 1918년 12월 29~30일 학우회 송년회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재일유학생들은 1919년 1월 16일 유학생웅변대회(조선기독교청년회관)를 개최하여 독립쟁취를 주장하는 연설 후 11명의 독립운동 실행위원을 선임했다. 실행위원은 최팔용, 서춘, 백관수, 이종근, 김상덕, 김도연, 윤창석, 송계백, 최근우, 이광수, 김철수. 

1919년 2월 7일 독립선언서·결의문(국문, 일문, 영문)을 인쇄하여 극비로 배포하였다.다음날인 2월 8일 일본 동경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배포했다. 이날 오후 2시 동경에 있는 재일 조선기독청년회관 강당에 동경유학생학우회 임시총회 명목으로 유학생 6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 현장에서 17명이 체포됐다.

‘2․8독립선언서’는 1919년 1월 초 송계백에 의해 서울의 정노식에게 전달됐다.

이 선언은 국내 3․1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1920년대 청년ㆍ학생의 항일투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국내외에 수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