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1907년 일제의 고종 강제 퇴위, 정미조약 강제 체결, 군대해산 등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에서 항일 구국(救國)운동을 펼친 김상태(1963년 독립장)·신태식(1968년 독립장)·김동신 선생(1977년 독립장)을 2022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김상태·신태식·김동신 선생은 1907년 정미의병이 봉기하자, 일제에 맞서 본인의 안위보다는 나라를 위해 항쟁을 펼치신 분들이다.

1862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김상태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선포에 항거하여 경북 문경에서 이강년 의진(의병진영) 중군장으로 의병에 참여했고,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의 제천의병에서도 활동했다.

1907년 정미의병이 발생하자 선생은 제천·단양 일대의 의병을 규합하여 이강년 의진에 합류했고, 이강년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한 후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의병을 이끌었다. 그해 9월부터 10월까지 문경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12월 전투에서 패전하여 이강진 의진이 해산되자 1908년 영남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1908년 이강년이 순국하자, 선생은 이끌던 의병과 이강년 의진의 남은 병력까지 모아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가 만나는 요충지인 단양군 지역에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본군을 공격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11년 6월 풍기군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고,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9월 순국했다.

1864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신태식 선생은 1895년 을미의병이 발생하자 문경 농암(籠岩)장터에서 문경과 상주 지역의 일제 밀정을 처단했다.

1907년 정미의병이 봉기하자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도대장(道大將)이 되어 이강년 의진과 합류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뒤 울진과 평해로 이동하여 신돌석과 함께 삼척에서 활동했다.

1908년 9월 홍주 전투에 참여했고, 12월 포천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1909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상고하여 10년으로 감형되어 1918년 출소했다.

선생은 1920년 9월 독립운동의 재정 후원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경상북도 단장을 맡아 군자금을 모금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지원하였다. 하지만 1922년 11월 의용단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1922년 대구 감옥에 수감,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충남 회덕에서 1871년 태어난 김동신 선생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자주 왕래하며 무주와 용담 등 영호남 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07년 8월, 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호남의병장 기삼연, 고광순과 함께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민긍호의 지원으로 선생의 의진이 강화되었고, 구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또한 순창 우편취급소와 분파소를 공격하는 등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후 의진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각지에서 의병들이 합류하여 1,000여 명에 이르는 부대로 규모가 확대되었고, 선생은 충청·전라·경상도를 아우르는 삼남의병대장으로 불렸다.

1908년 2월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펼쳤으나 선생의 의진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던 중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김상태 선생은 1963년, 신태식 선생은 1968년, 김동신 선생에게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