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항일투쟁에 나섰던 학생 청년들의 기록을 담은 학적부가 대거 발굴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윤00학생의 학적부.
연희전문학교 윤00학생의 학적부. "1941년 9월 함흥학생사건으로 경찰서에서 문초를 받아 퇴학시키기로 하였다"라고 기재. [사진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는 제93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11월 3일)’을 맞아 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해 퇴학, 정학 등 징계를 받은 60개 학교 2,596명의 학적부 기록을 공개했다. 지난 3년 간 각급학교와 국가기록원의 협조로 발굴된 기록이다.

징계 유형별로는 퇴학이 1,033명으로 가장 많았고, 무기정학 565명, 유기정학 483명, 훈계 199명, 무기근신 197명 등이었다.

학적부를 통해 드러난 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과 함께 ▲1926년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6‧10 만세운동 ▲1919년 3월 3일부터 1941년 12월까지 꾸준히 진행되었던 함흥학생운동 ▲1921년부터 1935년까지 동맹휴학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40년 노다이 사건 등 다양했다.

노다이 사건은 1940년 부산의 동래중학교,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이 전개한 항일학생운동이다. 부산, 마산, 진주, 인근 지역 학생을 모집해 열린 제1회 경남 학도 전력 증강 국방대회에서 조선인 학교인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가 우승하자 그 다음해 열린 제2회 대회에서 일본인 학교를 반드시 우승시키고자 심판장 노다이가 편파 판정한 것으로 촉발되었다.

총 60개 학교 중 지역별로는 경남에서 14개교 987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남 7개교 758명, 서울 16개교 285명, 충북 3개교 235명, 전북 8개교 172명, 강원 2개교 93명 순으로 많았다.

학교별로는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에서 90건, 부산에서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 727건, 부산제2상업학교(현 개성고) 281건, 광주공립농업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 150건 등 많은 학생의 참여 기록이 확인되었다.

개별적인 학적부 기록을 살펴보면, 연희전문학교 윤◯◯ 학생의 학적부에는 “1941년 9월, 함흥학생사건으로 함흥경찰서에서 문초를 받아 퇴학시키기로 하였다”라고 기재되었다. 그동안 동맹휴학이나 가사로 퇴학했다는 기록은 많으나, 구체적으로 함흥학생사건이라고 사유를 표기하고 있다.

부산의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 김00 학생의 학적부. 앞면(위)에는 퇴학사유를 '가사'라고 했으나, 뒷면(아래)에는 실제 이유가 노다이 사건때문임을 기재했다. [사진 국가보훈처]
부산의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 김00 학생의 학적부. 앞면(위)에는 퇴학사유를 '가사'라고 했으나, 뒷면(아래)에는 실제 이유가 노다이 사건때문임을 기재했다. [사진 국가보훈처]

부산에서 일어난 노다이사건에 참여한 부산의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 김◯◯ 학생의 학적부에는 앞면에 ‘가사에 따른 퇴학’이라 기재되었으나, 뒷면에는 노다이 사건으로 인한 처벌로 퇴학당했다고 실제 퇴학 사유가 적혀있다.

한편,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발원지이자 시위가 처음 발발했던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의 경우 학생들의 독립운동 활동과 징계기록을 상세하게 기록한 명예졸업대장이 남아 있었다. 명예졸업장은 1949년 전남지사로부터 승인받아 독립운동으로 불가피하게 졸업을 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수여된 것이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발원지였던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의 명예졸업대장. 독립운동으로 불가피하게 졸업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이 수여된 기록이다. [사진 국가보훈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발원지였던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의 명예졸업대장. 독립운동으로 불가피하게 졸업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이 수여된 기록이다. [사진 국가보훈처]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선조들의 목숨을 건 항일 독립투쟁에 언제나 청년 학생들이 있었다”며 “앞으로도 학생 독립운동 참여학교 학적부 등 지속적인 독립운동 사료 수집과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을 통해 그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구현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2022년 10월 말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자는 총 17,588명이며, 그중 학생독립운동 포상자는 719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