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아버지 최재형 선생의 서울현충원 국립묘지 묘 복원의 길이 열렸다.

러시아에서 펼친 대일항쟁의 아버지 최재형 선생. 사진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 누리집 갈무리.
러시아에서 펼친 대일항쟁의 아버지 최재형 선생. 사진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 누리집 갈무리.

국가보훈처는 17일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순국선열을 배우자와 함께 국립묘지에 합장하는 경우, 유족의 희망에 따라 순국선열의 영정이나 위패를 배우자 유골과 함께 묘에 안장할 수 있도록 하는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국립묘지법)’개정안이 국무회의 의결이 되었다”며 “이번 주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기존 국립묘지법에 의하면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국립묘지 안장대상자의 경우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하지 못하고 위패봉안실에 영정이나 위패로 봉안하거나 배우자의 유골과 함께 납골당인 충혼당에 안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애국선열 중에는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방해, 은폐로 유골이나 시신을 찾기 어려워 예우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유족의 안장선택권 확대에 관한 의견이 계속 제기되었다.

‘연해주 한인들의 페치카(난로)’ 또는 ‘시베리아 동포의 대은인(大恩人)’으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의 묘 조성에 관해서는 우여곡절이 많다. 1970년 원호처에 가짜 유족 최규흠이 당시 소련과의 왕래가 불가능한 점을 이용해 자신의 선친 유골을 최재형으로 속여 애국지사 묘역에 최재형의 묘를 조성하도록 한 ‘가짜 유족 사건’이 있었다.

1990년 한러 수교 이후 러시아에 생존 중이던 최재형의 7녀 최 엘리자베타가 1995년 한국을 찾은 후 문제를 제기했다. 2006년 5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유족관계 확인을 요청, 2009년 1월 故 최규흠(1984년 사망)을 대신해 자녀와 DNA 조사 결과 유족이 아님이 확인되어 유골을 원외 이장했다. 최재형 선생의 묘지 자리였던 108번 묘역은 빈터로 남았다.

그후 2014년 12월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발렌틴이 당시 국립묘지법에 따라 최재형 부부 위패를 신청해 서울현충원 부부위패 5판 149호로 안장되었다.

이번 개정으로 유족들의 요청에 따라 현재 키르키스탄에 묻혀있는 최재형 선생의 배우자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와 서울현충원 묘역에 함께 안장할 수 있게 되었다.

최재형 선생은 9세에 시베리아 연해주로 이주해 러시아 군대 군납상인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후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과 시베리아 한인들을 위해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1904년 항일조직 동의회를 조직하고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단’을 조직해 무력항쟁을 주도하다 1920년 4월 일본군의 총격으로 순국했으나 유해를 찾지 못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